모교

강릉중앙고의 정신

항일학생운동

강농의 반공운동

한일합방 이후 일제의 식민지 무단정치에 거족적으로 항거한 3.1 운동은 비록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쟁취하지는 못했을 망정 두가지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하나는 대외적으로 우리 민족이 일본에의 예속을 결사 반대한다는 것을 주장하였고 대내적으로는 민족해방 운동의 자생적인 기초를 굳게 구축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독립운동사 뿐만 아니라 한국사에 있어 분수령이 되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구한말 민족의 지도이념으로 봉건적 항일이념과 근대적 자유이념의 두 조류에 의해 민족사가 추진되어 왔으나 3.1운동은 전적으로 근대이념에 의해서 지도되었다.

따라서 이 운동이 대중화됨에 따라 자유이념이 확산되어 갔고 아울러 대중사회에도 근대적 자유이념이 일반화되어 갔다.

이것이 민족이념으로 부각되어 민족의 목표인 독립운동이 한층 발전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후 3.1운동보다는 규모가 작으나 1926년 6월 10일 6.10만세 운동으로 이어지고, 다시 1929년 11월 3일 전국학생운동으로 발전한 광주학생운동에 접맥되었다.

이처럼 3.1, 6.10 2대 항일운동의 뼈아픈 체험을 한 학생들은 이 운동이 민족해방운동의 전위임을 깨닫고 자신들의 힘으로 일제를 이 땅에서 몰아내야겠다는 결의를 다져갔다.

이리하여 6.10만세운동 이휴 전국 각 학교에눈 조직적이고 장기적인 항일투쟁을 목적으로 비밀결사가 조직되었다. 그것은 보다 강력한 항일투쟁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단결된 힘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성진회, 독서회, 신우동맹, 이학연구회 등 각지의 각급 학교에 수없이 많이 조직되어 있는 학생 비밀 결사는 외부의 민족단체와 연합되기도 하고 독립적으로 조직되기도 했다.


본교의 독서회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조직되었다.

뿐만 아니라, 3.1운동이후 국내외에는 수많은 항일운동 단체가 결성되었다. 이들 단체들의 성격에도 자유의지닌, 공산주의니 무정부주의 등 다양한 내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한가지 공통되는 점은 항일운동을 목전의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1925년 이후 항일전선의 교과적인 체제를 위하여 종합론이 대두되고, 이것이 실현되어 신간회가 1927년 2월 15일 서울 YWCA에서 창립되었다.

초대회장으로는 당시 조선일보 사장인 이상재(월남)씨가 선임되었다. 이렇게 하여 조직된 신간회가 말하듯이 독서회는 물론, 대개의 항일단체는 공산주의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단체들은 항일운동에서 左,右 할것 없이 공산주의자들의 구호인 '자치제국주의', 피압박민족 해방만세'등을 많이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평범한 구호보다는 항일투쟁에 보다 강렬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단체의 강령이나 이념은 보지않고, 또 구성원의 내용도 분석하지 않고 오로지 표면상의 구호나,단체의 이름만을 보고 공산계 단체로 생각해서는 아니된다.


그것은 신간회나 만주의 정의부의 구호만을 보고 공산 단체로 착각하는 격과 같기 때문이다. 또 광복후 남북대결의 이념과는 성격이 다르다. 그것은 일제하에서의 운동은 어떤 사상에 비중을 둔 것이 아니라 그 동기와 목적이 항일독립에 귀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본교의 항일운동을 다루기 전에 강릉의 시위항쟁을 대강 살펴보는 것도 의의 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강릉군은 지금의 강릉시와 명주군을 말한다.

그러나 만세운동은 강릉에만 있었고, 그것도 신교육을 받는 청년들이다.

3.1운동 당시 강릉청년회가 감리교회를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었으며, 감리교회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사상이 싹트기 시작했다. 특히 초당리에서는 궁연정이 초당의숙(속칭 영어학교)에서 청년들을 가르쳤고 그의 종제인 궁운일은 항교장의 동진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여기에서 영향을 받은 청년들과 감리교회의 강릉청년회, 초당리의 청년, 그리고 농민들의 3.1운동에 가담했다.

이리하여 강릉 장날인 1919년 4월 2일 감리교회의 안 록 목사를 선두로 청년회원들이 장터에 나가 태극기를 뿌리며 만세를 불렀다. 이 후 시위는 계속되어 동년 4월 4일에는 남대천에서 보 공사를 하던 농민 200여명이 공사를 마치고 괭이가 삽 그리고 가래를 들고 만세를 불렀으며, 4월 7일 장날에는 강릉청년회가 다시 계획을 세워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

일제측 기록으로는 군중이 200명이었다고 한다.

동년 4월 8일에도 강릉읍내에서 경미한 운동이 있었다고 한다. 그 동안 검거된 인원이 66명이라고 일제측은 기록하고 있으나 실제인원은 훨씬 많았을 것이다.


본교의 독서회 사건도 항일운동에 있어서 3.1운동떄 강릉군민이 보여준 항일 이상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강농의 항일 학생운동은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적으로 파급됨에 따라 11월 3일 중앙학생항일투쟁본부로부터 선정이 된 표석린(1기)과 노화경(2기)이 1930년 1월 하순 교내의 학생 책상위에 '격! 피박민족 조선청년학생 제군에게'란 격문을 제시해 놓았다가 긴급 출동한 일경에게 전문을 압수당한 강릉독서회 사전에서부터 시작한다

본교 독서회는 1929년 5월 1일 옥천동 당시 북경대학을 졸업하고 돌아온 권오훈의 집에서 본교 1기 동문인 최혁남, 안덕선, 김남두, 김종고, 배석진, 함종명, 최용승, 김태선 씨 등이 발기인이 되어 조직되었으며, 상회의 행동강령에서 밝힌 바와 같이 사회과학 및 일반서적을 논독하여 사회견문을 넓혔을 뿐만 아니라 , 일본 제국을 타도하고 조선 독립을 쟁취하는데 앞장 섰다. 이리하여 표출된 것이 1930년 7월 11일 부터 시작된 동맹휴교사건이다.

이 사건이 얼마나 심각했는가는 당시 강릉농업학교 동맹사건을 다룬 신문 기사가 입증해 주고 있다.


1) 1차 동맹휴교


1930년 7월 11일 , 다음 신문기사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당시 2학년 학생이 교사에게 불경하였다 하여 그 학생을 학교에서 퇴학처분을 하였다. 이것이 발단이 되어 2.3학년 학생들이 제적시킨 학생을 복교시켜 줄것과 원구 교장과, 평소 학국인 학생을 멸시해 온 교무주임 전결이랑 선생을 배척한다는 요구사항을 학교당국과 도지사에게 우편으로 진정하고 맹휴에 들어갔다. 그 다음날인 7월 12일에는 1학년 생도들도 여기에 합세하여 등교하였다가 수업을 거부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이에 분개한 학부형들이 학교에 모여 교장과 타협한 결과, 퇴학 처분한 2학년 학생의 복교와 앞으로 이사건에 대하여서는 어떠한 형태의 희생자도 더 내지 앟겠다는 약속을 교장으로 부터 받아냈다. 그러나 교장은 그 약속을 번복, 동년 7월 22일 이 맹휴사건의 주모자로 1회생인 김남두외 6명을 퇴학시키고, 1명은 무기정학, 10여명에게는 2주일간의 근신처분을 내렸다. 이것으로 이 사건은 일단락된 듯 하였으나 학생들의 항일 수단인 일본교사 배척운동과 이를 힘으로 막으려는 학교당국과의 싸움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거세어지기만 하였다. 이제 이 사건과 관련한 신문기사 (지금까지 수집된)를 실어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江陵農校 2.3年生

突然 同盟休校


학생 한명을 퇴학시킨 것이 원인이 되어서 일제히 맹휴


강원도 강릉 공립 농업학교에서는 지난 11일 돌연히 동맹휴학을 하였다는데 그 자세함을 들어면 11일 0시 30분경에 이르러 실습시간이 임박하여 돌연히 3학년에서 먼저 동요됨을 따라 2학년과 협력하여 무기 맹휴를 선언하고 각각 집으로 돌아갔다는데 그 원인에 있어서는 당일 오전에 2학년 생도 권수경이라는 학생이 선생에게 희롱을 하였다는 구실하에서 학교 당국에서는 당연히 퇴학을 명령하자 전부터 학생측에서는 학교 당국에 대하여 불평을 품고 내려오던차에 이러한 처분이 있자 우리로서는 학교 당국에서 너무나 경솔한 처분에 대하여 묵과할 수 없다하여 학교당국과 강원도지사에게 동맹휴학의 원인과 요구조건을 우편으로 진정하였다고 한다. (강릉)

(1930. 7. 15 조선일보)


江陵農業學校

盟休 漸次 擴大


일학년생도 참가 학부형은 대책 강구


지난 11일에 강원도 강릉 공립 농업학교 2.3학년에서는 제 2학년 생도 권수경을 복교시켜 줄것과 교장과 교무주임을 배척한다는 요구사항을 학교당국과 도지사에게 우편으로 진정하고 동맹휴학을 하였다함은 기보와 같거니와 그 익일에 이르러 제1학년 생도60여 명은 등교을 하였다가 우리의 상급생인 2.3학년이 공부를 못하고 방황하는데 우리만 편안히 앉아 교수를 받을 수 없다하여 한시간도 교수를 받지 아니하고 각각 집으로 돌아갔는데 2.3학년이 등교시 등교하지 않으리라 한다. 이에 대하여 학부형은 대단히 우려하여 학교에 모여 교장과 타협한 결과 처분당한 권수경 군을 시험전까지 해결지어 줄 것과 앞으로 희생자를 한 사람이라도 절대로 내지 않기로 결의하고 해산하였다 한다. (강릉)

(1930. 7. 16 조선일보)


江陵農校盟休生

六人을 退學 處分


한명은 무기정학을 시켜


강원도 강릉 농업학교에서는 지난 11일에 학교 당국에 진정서를 제출하고 동맹휴학을 하였다는데, 학교 당국의 처리에 대하여 학부형이 대단히 분개하여 총독부와 도 당국에 진정을 결의하였다함은 기보한 바이거니와 그후 몇날이 지난 22일에 이르러 돌연 학교 당국으로부터 금번 맹휴 사건의 주모자로 인정하는 김남두외 6명을 퇴학시키고 1명은 무기정학이요, 기타 10여명에게는 2주일간 근신을 명령하였다는데 지난 19일에 재차 학부형회를 개최하려 하였으나 금번 홍수로 인하여서 집회 불능으로 유회가 되고 다음 토요일로 연기하였다는데 당일 군수와 경찰서장이 학부형 대표 이원재 씨외 5명과 동교 교장을 군으로 불러 쌍방의 의견을 들은 후 서로 이해하도록 권유하여 해결에 노력하였다는데 아직 해결은 막연하리라 한다.

(강릉)

(1930. 7. 27 조선일보)


2) 2차 동맹휴교


1930년 9월 5일 여름방학이 끝나고 학교에 돌아와 뜻을 같이하는 교우들과 인사도 채 나누기 전에 1차사건에서 희생된 학생들의 뜻을 이어 2학년 학생 전원이 원구 교장선생과 전결이랑 선생의 배척을 결의하고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이에 맞선 학교측은 강경일변도로 다음날인 동년 9월 6일에 2학년 학생 6명을 퇴학시키고 나머지 36명에게 무기정학 처분을 했다. 이쯤되고 보니 학교 당국에서도 사태가 심상치 않은지라 등교한 1.3학생들을 감금하기 시작했다.

휴식시간에도 교사가 지키고 서서 교실 밖으로나가지 못하게 함은 물론, 심지어는 대소변까지 교실 안에서 보라고 하였다.

그래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던지 3일 뒤인 동년 9월 9일 에는 이렇다 하고 내세울 이유없이 3학년 학생 2명을 퇴학시키고, 3명을 무기정학에 처했다. 이처럼 이유없이 처분된 학생들이 교장을 찾아가 억울한 사유를 묻자, 교장을 답변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아무 이유가 없으니 더 물어볼 필요가 없으며 이상 더 따지면 업무방해죄로 경찰에 고소하겠다고 위협했다. 가혹하다 못해 처참하기까지 한 처벌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다음날인 9월 10에는 동요를 방지한다는 이유로 1학년 학생 8명에게 무기정학의 처벌을 내렸다.

이와 같은 학교처사에 격분한 1학년 항생이 동년 9월 27일 2학년에 합세하여 동맹휴학을 단행하였다.


물론 1학년 할생들도 2학년 학생들과 일본인 교사 배척에 뜻을 같이 하였다. 이와 같은 요원의 불길처럼 꺼질줄 모르고 타오르기만 하는 항일의 수단이 일인교사 배척운동은 사태가 점점 악화되어 이틀 뒤인 동년 9월 29일에는 2학년 학생 2명이 배후 주동자로 몰려 경찰에 구속되는데 까지 이르렀다.

이에 최준집씨등 지방유지들과 학부형이 연합, 당국과 타협한 결과 검거학생 석방과 무조건등교로 일단락을 지었다.

그리고 다음해인 1931년 1월 20일 학생들의 표적이었던 전결이랑 선생이 철원 농잠실업학교로 동년 6월 4일 교장 원구 선생이 상주 농잠학교 교장으로 전보되면서 학교는 다시 평온을 되찾은 듯하였다.

이들 두 선생의 전입은 아마도 인책전보가 아닌가 생각된다.


江陵農校盟休

雙方 態度 强硬

학생들은 가로에서 방황 아직 解決策 漠然


강릉농교에서는 제2학년 생도 일동이 지난 9월 5일에 이르러 교장과 교무주임 배척의 요구조건을 들어 학교당국에 제출하고 동맹휴학을 단행하였다 함은 기보한 바와 같거니와 그 익일인 6일에 이르러 학교당국으로부터는 2학년 생도중 6명의 퇴학생을 내고 그 나머지 36명은 전부 무기정학을 시키어 처분받은 학생들은 개학한지 몇날 안된 오늘에 이르러 도로에서 방황하고 있는 바 해결의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고 학교 당국측과 학생측의 쌍방 태도는 더욱 강경하여 해결이 막연하다고 한다.

(1930. 9.11 조선일보)


江陵農校盟休

雙方 態度 强硬


일, 삼학년도 동요될 듯, 삼명은 무기정학


[江陵] 강릉농교에서는 개학초기에 이르러 2학년 일동이 진정서를 학교 당국에 제출하고 동맹휴학을 단행하여 학교당국으로부터는 6명의 퇴학생과 36명에게는 무기정학을 처분하였다 함은 기보한 바와 같거니와 문제는 더욱 악화되어 1.3학년도 동요될 기미가 보이자 학교당국으로부터는 만일을 염려하여 휴식시간에 있어서도 교실 밖으로 나가는 것을 엄금하며 교수가 체번으로 수직하고 있는다는 바 심지어 대소변까지도 나아가지 못하게 하고 실내에서 하라는 등 절대 자유를 구속하고 감금이 자심하여 수라한 가운데 공부도 잘 계속지 못하고 학생들은 등교하여서는 감금만 받는 셈이라고 학교당국에 대하여 비난이 많다는 바 지난 9월 9일에 이르러서는 학교당국으로부터 제3학년 생도 최종태, 정현택 양명을 퇴학시키고 이종대외 2명을 무지정학을 시켰다는 바 처분받은 학생들은 너무나 애매한 처분에 대하여 무슨 이유로 퇴학시키는냐고 물은 즉 교장의 답은 이유는 없으니 물을 필요는 없다.

만일 오래 지체한다면 사무 방해죄로 경찰서에 고소하겠다고 위협적 언사로 대답하여 이유을 물으러 간 학생들은 무료히 돌아갔다는 바 사건은 더욱 중대화하여 해결이 막연하다 한다.

(1930. 9. 15 조선일보)


3) 3차 동맹휴교


1933년 6월 20일 3학년 학생 전원은

1. 실습시간을 단축할 것

2. 선생의 모욕적인 행동을 없앨 것

3. 십국웅선생을 사직시킬 것

등을 내걸고, 이것이 관철 될때까지라는 단서를 붙여 동맹휴학에 들어 갔으며, 동년 6월 22일에는 전교생이 이에 합류하였다.

삼차 사건의 발달은 1932년 11월, 3학년 2명, 2학년 9명, 1학년 2명이 3학년인 최건영의 하숙집에 모여

" 친애하는 전교 학우 여러분! 금일은 광주학생 항일의거기념일입니다. 훌륭한 광주학생들의 애국정신을 본받아 우리들도 최후까지 싸워 승리를 쟁취합시다"

라는 격문을 써서 동년 11월 3일 출입문 정면 벽 위에 붙여 학생들에게 항일을 독려하였다. 다음해인 1933년 6월 20일, 뒤의 인용기사(1933.6.30 조선일보)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방과후 수견을 강요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동맹휴학을 단행한 것이다.

이에 당황한 학부형측에서는 장전 교장을 찾아가 해결책을 모색하였으나 실패하고, 종국에는 급파된 일경 고등계형사대와 격투까지 별여 100여명이 경찰에 검거되는 참상을 빚었다.

일제의 경찰문헌에 48명을 검거했다고 수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이 사건의 규모가 얼마나 컸던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江陵農校紛糾

學務課長이 調査


1.2학년도 3학년과 합류 교장 문책도 할 듯


(강릉지국전) 문제중의 강릉공립농업학교 분규사건은 22일 이학교 당국으로부터 학생측에 회답할 날임으로 당일 오후 2시에 사태를 관망중이던 제1, 제2학년생 일동도 3학년생의 행동에 합류하여 교장실에 달려가 요구 항목에 대하여 회답을 요구함에 교장은 구두로 생도측의 요구에 대하여 일일이 회답을 하였으나, 생도측은 만족치 않고 의연 해결을 짓지 못하고 이 날도 보내었다.

당일에는 사복 경관 세명이 경계하였으나 생도측에 직접 행동으로 나아간 자가 없었음으로 다행히 불상사는 없었다. 일방 당지에서 24일부터 개최하는 강원도 공립 학교장 회의에 열석코자 출장중인 도지사 일행중 학무과장은 예정을 변경하여 23일 오후 1시에 동교에 가 이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는 모양인데, 이 조사 여하에 따라서 이 학교에서는 과거에도 이러한 종류의 사건이 속출하였음으로 경우에 따라서는 교장의 책임을 물을런지도 모른다고 관측된다. 22일에 이르러도 이 사건은 해결에 이르지 못하였다.

(1933. 6.24 조선일보)


4) 독서회 사건의 진상

김 천 회


내가 입학한 떄는 일제치하의 1931년도였습니다. 회수로 치면 제 4기생이 됩니다만 나 역시 입학과 동시, 처음으로 원대한 희망을 품고 성실한 학도생활을 하여 청운의 뜻을 이루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영동, 영서 각처에서 모여든 학우 50명으로서는 단출한 학급이였습니다만, 차츰 함께 생활해 나가는 동안에 형제와 같은 정을 느낄수가 있었습니다.

바지 저고리에 두루마기를 입고 교모를 쓴 촌스러운 모습이 우스웠지만, 교복을 난생 처음 배정받아 입어보니, 아주 훌륭한 양복신사가 된듯 하였습니다. 때로는 실습복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하였습니다만 시민들의 환대는 어린나이에도 공연히 우쭐대며 어깨를 놓이게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시절이 그립기만 한 옛날입니다.


꿈많고 순진하던 1학년은 지나가고 2학년이 되었을 무렵입니다. 1년동안 교내에서 가장 친하게 진내던 심호섭, 최혁인 형들과 숙의한 끝에 결심한 바가 있어 농교의 독서회 설립사업에 착수하기로 합의하였습니다. 당시 중국 상해에서는 우리나라의 감시정치가 마련되어 김구선생과 노백린선생들이 활약하고 계셨고, 국내에서는 김성수 선생과 송진우 선생이 (동아일보)를 경영하면서 민족운동을 지도하였으니, 함남을 위시하여 전국 각처에서도 항일투쟁사건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간도에서 5.30 폭동이 일어나고, 경성, 평양 등지에서는 대소 공장의 임금인상 파업이 속출하고, 전국 각 학교 역시 휴학동맹 등으로 실력행사를 하여 조선독립을 쟁취하자는 목적아래 일제에 항거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였습니다.


그러나 야만적인 일본전국은 만주를 강점한데 이어 관동주 교두보로 삼아 북경을 중심으로 한 일권을 북지에 또 상해를 중심으로 한 일권을 남지에 묶어 그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국내외의 정세하에서 우리도 농교에 항의하는 투사가 있음을 널리 알리고자 국제 맹세하니 우리들의 의사에 찬상하는 동지가 늘어서 10여명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즉각독서회의 조직을 완료하고 아래와 같이 삼대 행동강령까지 장만하였습니다.


1. 사회과학 및 일반서적을 윤독하여 사회견문을 넓힌다.

2. 일제 식민 교육정책을 반대한다.

3. 일본 제국을 타도하고 조선독립을 쟁취하는데 앞장을 선다.

이상의 3개항을 달선하기 위하여 가급적 주일회 이상은 집합하여 연구토론 하기로 정하고 3.1절 기념행사 및 5.1메이데이, 6.10만세사건, 11.3 광주학생사건 기념일 등에는 시간과 장소를 극비에 붙여 다니면서 따로 기념행사를 거행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지도하여 주신 분으로는 강릉신간회 정윤시 씨와 강릉무산서점 주인인 양덕선씨, 북경대학을 수업하고 돌아온 권오훈씨, 선배 김성열씨 등 네 분 동지였고, 우리 급에서 금석 같이 굳게 뭉친 맹우들은 심호섭, 최건영, 권혁인, 최호섭, 김창회, 김형도, 김혁래, 이동언, 박연교, 박병찬, 염재근, 박용대, 김천회 등으로 3학년 2명과 2학년 9명, 1학년 2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급기야 1932년 광주학생사건 기념일에는 최건영 하숙집에 모여 기념행사를 빙자한 투쟁방법을 심의한 끝에 11월 3일 전교생에게 호소문을 보내기로 하고

"친애하는 전교학생 여러분, 금일은 광주학생 항일의거 기념일 입니다. 훌륭한 광주학생들의 애국정신을 본받아 우리들도 최후까지 싸워 승리를 쟁취합시다."

라는 내용의 격문을 달서가인 최호섭형이 백설같은 백로지에다 먹흔도 림림하게 대서특필한 후 이를 야간을 이용하여 출입문 정면 벽상에 높이 부착하였습니다.


이튿날, 등교한 학생 전원이 이를보고 몹시 흥분하였으며, 이에 당황한 학교측은 즉시 이를 제거함과 동시에 표면상으로는 태연한척 하면서도 내사를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반면, 우리들은 더 굳게 뭉쳐 계속 투쟁할 마음에 자세를 가다듬었습니다.


세월은 흘러 3학년 상급생이 되었을 때, 우리들은 또다시 유익하고도 빛나는 마지막 학생시절을 장식하기 위하여 쟁취적으로 반제활동을 펴기로 했습니다.

6월 하순절이었습니다. 양잠실에서 수잠수업중 담당 일인교유가 학생들의 수업태도가 불성실하다는 구실로 갖은 욕설을 다 퍼부은 사실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조선인은 미개한 야만종'이라는 폭언을 하면서 일인의 우월성을 내세워 학생을 함부로 구타하니, 이에 격분한 학급전원이 실습을 중지하고 맞대결로 싸우게 되었던 것입니다. 즉각 3학년 전원이 집합되고 집합끝에 급장인 김성교, 고철규, 원규영 등이 잇달아 웅변을 토하여 야만적이고 몰상식한 일본 수유 십국웅 선생을 규탄하고 추방할 것을 결의 하였습니다. 이 목적이 관철될 때까지 수업을 거부할 것도 선언하며 동맹휴학에 돌입하였던 것입니다.


별도로 우리독서회는 긴급회의를 열고 본 건을 우발적인 것처럼 가장하면서 가급적 희생을 피하되 보다 강력한 전위활동에 의해 목적거행의 수단으로 삼기로 했습니다.

다음날 우리의 결사대원은 등교와 동시 전교생에게 우리의 결의를 표명하고 곧 교장실로 들어가서 장전 교장을 대상으로

1. 십수유를 태면할 것

2. 학생에 대하여 언동을 신실히 할 것.

3. 실습시간을 줄이고 과학이론시간을 보다 많이 할애해 줄 것.

등을 제시하고, 이상 3개항이 수용될때 까지 수업을 거부한다는 선언을 하였습니다.

교무실에 들러서는 십수유에게 자진사퇴를 요구한 후에 교실로 돌아왔으나 사태는 이미 극우로 발전하여 저학년 전원이 동조를 자청하게 되니 필연적으로 전교생 동맹휴학으로 번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간 학교측은 교장을 선도로 전수유가 학생에게 설득공작을 펴고 학부형 회의를 소집하는 등 몇가지 해결 방법을 시도하였으나, 이 모두가 실패로 돌아갈 수 밖에, 결국 악명 높은 일경고등계 형사대가 파견되고, 파견된 주구들이 우리의 일부를 연행코자 하면서 전교생에게는 폭력으로 해산령을 내렸으나, 전교생은 미동도 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맞대결로 종말에는 격투가 전개되는 듯 실로 어린 학생들이었으나 그 양면은 용감하고 장관이었습니다.


그러나 역부족으로 약 1시간동안 맹렬히 싸웠을 뿐, 맨 주먹인 우리들은 부득이 해산을 당하고 교문 또한 굳게 닫힘과 동시 무기휴교령이 내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해 7월초 주모자 약 10여명은 퇴학처분을 받고 잔여학생들은 학부형 연서로 서약서를 쓰는 등 재차 학업은 계속되었으나 결국 주모자인 독서회전원이 희생됨으로써 동맹휴학사건은 일단락 난 셈이 되니 그 명단은 최호섭, 박병천, 김형도, 원규영, 권요걸, 염재근, 김천회, 박용대 등으로 기억됩니다.


그 후 10월경 강릉농민동맹, 거두영동조합, 독서회, 반제국동맹 사건이 수사가 되어 전원 약 2백여 명이 검거되고 서대문서원에 의해서 화물처럼 화차에 실려갔습니다. 압송 된 우리들은 각 감방으로 분산 수용되었으며 가혹하고도 처참한 고문취조 끝에 임의로 조서를 작성당하고 치안유지법 위반죄목이 붙여져 경성지방검찰청에 송취되니, 현저동 101번지 서대문형무소의 수감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듬해 5월 하순 강농동지들은 기소유예로 석방되었으나, 그간 일본경찰의 잔인무도한 포악성을 뼈저리게 느꼈을 뿐입니다.

수감동지는 김석열, 심호섭, 최건영, 권혁인, 최호섭, 김형도, 이동언, 김혁래, 박병천, 박연교, 염재근, 박용대, 김천회, 김창회, 윤병대 등 15명이었는데, 지금은 거의 타계하고 생존동지라고는 다만 박병천, 염재근, 그리고 본인을 합하여 3,4명에 불과 합니다.


(제4회 동문)

1945년 8월 15일 연합군의 승리로 이 땅에서 36년 동안 우리 민족을 지배하였던 일제의 통치는 드디어 막을 내렸다. 그 기쁨은 강릉지방에도 찾아와 광복의 환희에 거리는 온통 태극기로 메워졌다.

그러나 그 기쁨 속에서 일제가 물러난 각종 기관들과 시설물을 누가 먼저 맡아 운영하느냐 하는 분쟁이 벌어졌다.


당시 강릉지방에는 광복과 함께 공산세력이 앞서 준동하는 바람에 그들은 행정과 치안질서까지 장악하려 들었다. 이들은 음모를 분쇄하여 본교를 공산세력의 수중에 넘기지 않으려고 당시 교사로 재직하고 있던 최용근 선생님을 중심으로 박창균, 최용식,서만 ,한덕용, 정대교, 고봉주,김섭기 ,조철현, 김연섭 ,이은균, 최윤승 , 김유진 등 다수의 학생들이 그들과 맞싸워 학교를 지켰다.


이 사건은 강릉 우세 학생 운동의 시발인 동시에 공산세력에 대항하는 민족진영 의 첫 시초으로서 뜻있는 지역 유지들로 구성되어있던 임시 학교운영위원회를 조직하는데, 커다란 힘이 되었다. 그리고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학생대 을 편성하여 학교를 경비하였고, 강릉지방 일부의 치안을 담당하여 반공 운동의 선봉이 되었으니, 그 반공의 선구자적인 선학들의 정신은 본교의 위대한 전설이 도어 아직도 선선히 흐르고 있다.

1950년 새벽 동족상잔의 전쟁을 도발하였던 북괴군은 강릉을 점령하기 위해 쳐들어조자, 아군은 최후까지 분전을 하였으나 작전상 그해 6월 27일 대관령을 넘어 후퇴하였다.

그 다음날인 6월 28일 강릉이 완전히 적의수중에 들어가 본교는 더 이상 수업을 계속할 수 없어서 휴교를 하게 되었다.


이때 피난길에 오르려던 일부의 교사들은 전쟁의 참화로 파괴 ,소실 된다면 강릉의 모습은 영영 되찾을 수없다는 판단에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학적부와 연혁지만이라도 남아있다면 강릉의 역사는 영원히 이어져 나갈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남규욱 ,서병소, 심재경 등 3명의 재직교사들은 본교의 학적부과 연혁지를 땅에 깊숙히 묻고 피난을 떠났다.


그러나 위급한 상황속에서도 사명감을 잊지 않아썬 그분들의 현명한 판단 때문에 그 후 적치하 3개월 동안 학교를 대표 , 상징할 수 있는 학적부와 연혁지는 소중하게 보관, 유지가 되어 강농의 맥을 굳건히 이을 수 있었다.

6.25 전쟁이 도발하자 전시 대비가 없었던 아군은 남하를 거듭할 수 밖에 없는 매우 위급한 처지에 빠졌다.

이렇게 국가의 운명이 누란지세 처하게 되자, 약 30여명의 재학생들이 구국일념의 애국심으로 무장하여 학도병으로 자진참여하였다.


이들 중 6명은 전사하였으며, 다수의 학생들이 부상을 입고 귀가하기도 하였다.

당시 학도병들은 청춘의 불타는 꿈을 조국에 바치겠다는 굳건한 기개로서 적과 대항해 싸워 희생자가 많았는데, 그들은 꽃다운 젊은 생명을 조국에 바친 구국의 수호신이 되었다.

특히 그들의 무용담을 발굴, 소개하고자 1971년 6월에 월간지 '강원교육'에서 6.25 특집호를 펴 내면서 현상모집하였던 '6.25참전수기'에 당시 학도병으로 참전하였던 23기 최종득 동문이 '잊혀지지 않는 그날'이라는 제목으로 응모하여 입상하기도 하였다.

현재 강릉시 남산에는 모든 시민들이 반공의 귀감으로 삼고 있는 삼학도의 묘가 있다.

이 삼기의 묘 가운데 제 19회 최오규 동문의 묘가 있어 여기를 찾는 애국시민들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본교 농과를 졸업하고 서울 대학교 의과대학 1학년에 재학중이었던 최우규 동문은 고향 강릉이 적 치하에서 신음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목숨을 걸고 고향을 구하고자 뜻을 같이한 3.4명의 동지들과 함께 주보로 서울에서 강릉까지 잠입하여 애국결사대를 조직하였다. 거의 24시간동안 토굴생활을 하며 구국을 위한 세부 계획 작성과 실행 방안을 수립한 다음, 그것을 행동으로 옮겼다. 그리하여 늘 라디오를 청취하며 전쟁의 전개 상황을 파악하여 유엔군의 참전소식과 전세가 뒤집혀졌다는 소식 등을 문안에 작성하여 , 밤을 이용해서 시민들이 눈에 잘 띄는 곳에 부착하여 시름에 빠져 있었던 시민들에게 용기를 심어주었다.


이처럼 용맹스러웠던 결사대였기에 날이 갈수록 많은 학생들이 대원으로 가입하자 공산 괴뢰의 소위 정치보위부에서는 그들의 체포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러한 수난 속에서 고유의 명절인 추석을 맞았다. 대원 한사람이 고향에 다녀오겠다고 하기에 최동문은 행동 조심을 당부하며 귀향케 하였는데 , 그는 귀향길에 불심검문을 받아 적도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그 대원은 끝까지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 하였으나, 저들의 모진 고문에 견디지 못하고 모든것을 발설하고 말았다. 안타까운 일이 되었다.


그래서 1950년 9월 초순, 공산 괴뢰의 정치보위부원들이 결사대의 비밀장소인 토굴을 급습하여 최동지를 비롯한 삼학도는 체포되고 말았다. 공산괴뢰들에게 끌려간 삼학도는 그날로 유치장에 감금되었다.


그 후 1950년 9월 30일 아군과 유엔군은 합동작전을 펴 강릉을 수복하였다.

아군의 북진으로 적도들이 마지막으로 강릉에서 패주하던 날 밤, 그들은 우리 반공인사들을 홍제동에 있는 포강변으로 끌고 가서 무참하게 학살하여싿. 이때 최동문과 김동훈, 박준열 대원이 저들의 총탄에 맞아 희생되었는데 , 후세에 이들의 그 장한 넋을 추념하고자 삼학도라고 부르게 되었고, 그 열렬한 애국심을 후대에 영원히 전하고자 강릉시민 공원이 남산공언에 안치해서 이 지역 반공 교육의 도장으로 삼고 있다.

최 오규 동문의 묘 앞에 비석에는 '순국학생최오규의 묘'라 새겨져 있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공산도배들을 이땅에서 몰아 내려고 조국의 영령이 된 최동문의 살신보안의 정신은 영원히 강농인의 마음속에 각인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