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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계(破戒)

조회1,560 2012.04.30 16:37
소요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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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 하나.
어떤 저녁자리인데 처음 만난 한 사람이 자기에게 목소리를 낯추며 말하더란다.
"꽤 이름있는 스님인데 비밀 한가지 알려 드릴까요?"
그리고는 두어번 주위를 살피더니 조근조근하게 말했다.
"몇년전에 친구들과 00스님방에 들렀습니다. 그러데 '자리가 영 심심하네' 하시더니 벽장에서
술과 육포를 꺼내는 거예요.거기서 그걸 같이 먹고 마셨어요"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스님=채식의 등식이 무너져 버린 것이다. 그리곤 말했다.
"스님이 어떻게 고기를 먹어요? 계율을 어긴거잖아요"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스님은 정말로 고기를 먹지 않고 목사님은 정말로 술을 한방울도
마시지 않을까?라는 해묵은 의문이 들었다. 자료를 찾아보니 미얀마, 태국, 스리랑카 등의
남방 불교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그곳 스님들은 고기를 먹었다. 탁발로 구한 음식이라 가리지 않는거였다.
티베트 불교의 라마승들은 고원지대라 단백질을 섭취하지 않으면 고산병이 걸리므로 고기를
필히 먹어야 한다. '고기를 먹지 말라'는 규율은 불교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 온 뒤에 생겼
다고 한다.
이것이 '살생을 하지 말라'는 계율로 확대적용된 것이다.
기독교에도 술을 마시지 말라는 계명은 없다.
다만 성경에는 '술에 취하지 마라. 거기서 방탕이 나온다' 등의 구절이 있을 뿐이다.
가토릭과 성공회의 신부님,개방적인 개신교단의 목사님들 일부에서는 공개적인 자리에서
담배도 피우고 술도 마신다.
결국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면 파계(破戒)인가? 아닌가?
계의 본질은 '마음을 지키는 것'이다.
예수의 사랑도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고 부처의 자비도 마음에서 나오는 것,
술과 고기를 먹는것과 마음을 지키지 못하는 일중에 어느것이 파계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ㅡ데카르트의 유명한 말이다.
근대 서구 철학을 탄생시킨 이 한마디는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정면으로 끌어 냈다.
여기서 생각(코키토 cogito)이란 '나는 의심한다'라는 회의 또는 질문을 뜻한다.
이 의미는 곧 '반란'에 해당한다.
상대의 절대적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거기에 복종하지 않겠다는 모든 질서와 원리에 대한
반격인 것이다. 바로 그순간에 인간은 자신의 진정한 존재감을 느끼게 되므로 코키토란 긴장
또는 대결이 매우 중요한 기초가 된다.
바로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어떤 사회가 되는가가 결정된다.
그런 사고능력을 갖이고 있는 사람을 '자아의식이 있는 개인'이라고 정의한다.
이 '자아(自我')란 '스스로라는 적'과 싸워 치열한 투쟁을 거치면서 완성되어 간다.
개인의 집합체가 사회라면 자아란 그저 한 개인으로 그치는 차원을 넘어서서 사회적 책임
까지 담아내고 있다.
여기서 코키토와 자아는 물질적인 것에 의존하지 않는다.
즉 정신적인 것은 물질적인 것과 철저하게 구분되며, 그것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무엇인가? .
그렇다면 코키토와 자아의 정신적 연합에 의한 사회변화는 어떻게 되는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톨스토이는 이 문제의 정답이 '마음속에 사랑을 지닌 사람들의 행동(behaviorism)에 의해
내가 살아 가는 것이다' 라는 사실을 여러 소설을 통해 알려준다.
더 뜯어보면 사랑이라는 감정보다 실천이라는 행동에 의해 사람은 살아간다는 것.
'행동'을 이렇게 바라보는 시각은 20세기 심리학의 랜드마크라 불리우는 프레드릭 스키너의
주장에서 나온다.
프로이드 이후 가장 영향력있는 심리학자로, 사회사상가로 평가 받고 있는 그는 인간관과
문화관을 이렇게 제시했다.
'인간이 겁을 먹고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달아나기 대문에 두려워 한다'는 윌리엄 제임스의
견해를 감정이 행동을 지배한다는 관점을 올바르게 잡은 것이라고 평가한다.
스키너가 마음보다 행동의 주요성을 강조하는 논리는 다음과 같다.
'그 어떤 이론도 인간이 인간을 변화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인간의 행동을 보다 효과적으로
다룰수 있다면 해 낼수 있다. 예를 들어 아기들을 가족보다는 공동체의 손으로 키우게 함으
로서 자기 자식만 사랑하던 부모들을 모든 젊은이에게 똑같이 관심을 쏟는 존재로 바꿔
나간다.'
생각이 모든 자아를 현성한다는 데카르트의 철학과 행동을 앞세운 스키너의 이 두 주장은
일견 어느면에서는 불일치 되는 듯 하다.
그러나. 행동 역시 생각에서 나온다는 윌리암 제임스의 이론이라면 인간을 변화 시키는 심리
학적,사회학적 측면에서 두 사람의 논리는 같은 것이라 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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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앞의 일화를 되색임 해 본다.
스님이 고기를 먹고 목사가 술을 마시는 그 행위는 데카르트에 의하면 코키토와 자아가
'스스로라는 적'과 싸워 치열한 투쟁을 거치면서 완성되어 갔음을 알수있다.
'나는 무엇인가?' '내가 알고자 하는 도는 무엇인가?"라는 회의를 통해 결론에 이르는데
있어서 물질적인 부분은 아무 역활도 못한 것이다.
고기를 먹어도 그건 고기가 아니였고 술을 마셔도 그건 술이 아니였다.
오로지 내가 얻고자 하는 진리라는 정신적인 사실만이 내 존재함에 영향을 주었을 뿐이다.
그들의 거침없는 행동은 스키너의 이론에 따르면 '이를 일상에 접목시키는 그들의 행동이야
말로 허위를 껍질을 벗고 자신들의 도를 진정하게 꽃피울수 있게 될 것이다' 는 경지라고 할수 있다.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는데 그걸 보고 두 스님이 말다툼을 시작했다.
"깃발이 움직이는 것이다" "아니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이다"
다툼이 그칠줄 모르는데 마침 지나가던 혜능 스님이 한 마디 '툭' 던졌다.
"움직이는 것은 바람도 아니고, 깃발도 아니다. 그대들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
삼라만상은 원래 부터 그렇게 그냥 있는 존재다.
'분다' '펄럭인다' 하는 것은 모두 나의 '생각'이다.
쉽게 말하면 '나'라는「에고(ego)의 창」을 통해 바라보는 풍경인 것이다.
바람은 원래 그냥 바람이였고 깃발은 원래 그냥 깃발이였을 뿐이니 이제 자신의 틀에서 벗어
나면 그냥 바람, 그냥 깃발일 것인데 또 무슨 '흔들림'이 있을 것인가.
바로 그 순간에 나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이 되고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이 되는 것이다.
놀라고 걸리고 물드는 '나' 라는 에고의 창, 그 색안경을 홀연히 벗었기 때문이다.
스님이 먹는 고기. 목사님이 마시는 술 역시 에고의 창에 씌인 색안경을 벗을때 그냥 고기요
술일 뿐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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