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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보물

조회200 2018.12.06 19:40
김석연2

어렸을적 살던곳은 철광이 생산되던 양양이었습니다.

아버지를 따라 그곳엘 가서 고향에 다시 오기까지는 10년만이었지요

어렸을때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자란 탓에 내 소년시절의 추억도 철광을 빼곤 없는것 같습니다

작난감이 다양하지 못한때라 가지고 놀만한 것도 별로 없을때

유일하게 빛이 나는게 있었으니 그게 바로 쇠다마였습니다.

우린 그냥 다마라고 부르곤 했고 으례 다마라고 하면 쇠다마인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유리로 만든 다마도 생겨났더군요

유리다마는 쇠다마에 게임도 안되었지요

맞춰먹기라고 했지요

한쪽 눈을 감고 상대편 다마를 향해 던져서 맞으면 잽싸게 줏어와서 내께 되는건데

유리다마는 맞으면 깨지니까 상대가 안되었고 아예 유리 다마는 써 주지도 않았지요

그만큼 쇠다마는 우리에게 최고의 보물이었고 언제나 주머니가 불룩하도록 가지고 다녔지요

광산 고철장에 가면 폐광차 바퀴 베아링이 많았습니다.

일단은 폐품이니 가져가도 될법하나 고철도 팔면  돈이 되니 경비가 엄했습니다.

경비아저씨 몰래 베어링 하나쯤은 가져올수도 있었지요

문제는 베어링을 가져와서 테두리 쇠를 어떻게 깨느냐입니다

친구들과 둘러 앉아 망치로 깨어도 보고 안쪽 휠을 뺄려고 노력해봐도 허사입니다

어찌어찌 몇시간을 공들여 힘을 쏟다보면 드디어 다마가 빠져 나옵니다.

그때의 그 감격스러움이란......

빤짝빤짝 빛이 나는 12개의 동그란 다마는 내 인생 최고의 보물이었습니다....그때는.

그리스가 묻어 있으면 대숩니까? 집에서 가져온 떨어진 양말로 닦고 또 닦고 애지중지 애지중지한

나의 신기롭고 광채나는 보물이었지요


모교를 졸업하던 해가 1971년도. 어느덧 47년이나 지났습니다.

모교를 위해 도움을 준것도 무얼 해 놓은것도 없습니다만 모교를 향한 그리움은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3년동안의 幸과 福이 그곳에 있어서 그런게 아닐런지요

모교는 나에겐 寶物입니다.



 

어단파파 2018.12.07 07:41:57
다마(구슬)치기, 빳지치기, 제기차기, 자치기, 고무공 차기 ..
장난감이 귀했던 그 시절 유년기의 놀이문화였지요.
개와(호주머니) 안에 묵직하고 두둑하게 넣고 다니던 구슬(다마)과 빳지,
그중에 쇠구슬이었다면 으시댈만합니다.
애잔하게 밀려오는 추억, 다음 글이 기대됩니다. ^^ㅎ
임욱빈 2018.12.07 09:34:17
그 당시는 "쇠구슬"도 귀했지요.
"다마"는 일본어인데 당시 부르던 명칭이어서 더 친숙하게 느켜지나 봅니다.
마찬가지로 "오징어"를 "이까"라고 부른 것이 6,70년대에는 더 많이 쓰지 않았나 싶습니다.
어단파파 선배님께서 언급하신 바와 같이 당시의 놀이문화가 점점 사라져 가는 것 같습니다.

90년대 초 교편잡고 있는 마눌에게 대학원에 진학하여 "산업화 전 어린이의 놀이 문화"란 주제로 각 도별 놀이문화를 연구해 보라고 제의했으나 마눌이 대답안해 수집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 가면서 "고향"에서의 유년시절, "모교"에서의 학창시절이 더욱 그리워 지는 것은
선배님의 마음과 같다고 봅니다.
늘 건강하십시오.
에이포 2018.12.07 12:34:41
딱히 놀이가 마땅치 않았던 그 시절은 치기시대였던 듯싶습니다.
다마치기, 빳지치기, 비석치기, 자치기 등
모 국회의원이 국회발언에 써서 비난을 한 몸에 받았던 ‘야지’는 물론 
일본어를 일본어인줄도 모르고 함부로 써왔던 어쩌면 참 불행했던 세대.
가령
“소데는 언제나 콧물을 닦아 반질 반질 했고, 와끼 개와에는 늘 다마가 가득했다. 간나들 고무줄 놀이 하는데 겐세이 놓으러 가자. 틀렸으면 고무세키로 지워...등 "
아무튼 이런 말들을 스스럼 없이 했던 지난날들의 기억들이 오롯이 되살아나는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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