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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 박명근 고문님의 <‘老 기자’의 취재 비망록>울진. 삼척무장공비 추적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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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장(박경순) 작성일 2009-02-03 10:35 댓글 0건 조회 3,09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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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老 기자’의 취재 비망록>울진. 삼척무장공비 추적기(1)
악조건에서도 현장에 뛴 사건이 ‘기자’를 평생직업으로 선택한 동기가 돼

1968년 11월 3일 새벽 전화 벨소리가 단잠을 깨웠다. 전화기를 든 순간 약간 흥분된 목소리로 “여보 박 기자, 잠을 깨워 미안합니다만 지금 울진. 삼척지구에 북괴 무장공비(共匪)가 침투하여 아군과 교전중이니 빨리 현장으로 가시오” 하는 취재지시였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당시 MBC 보도국 박근숙 부국장이었다.

당시에는 대중교통수단이 여의치 않아 동해에서 울진까지 가는 것은 큰 어려움이 아닐 수 없었다. 평소 잘 아는 서울신문 지국장인 윤재극씨를 찾아가 사정 이야기를 하자, 지프차를 내주었다.

험준하고 위험한 태백산 허리의 2차선 비포장 도로를 굽이굽이 곡예운전을 반복하면서 정신없이 달려 경상북도 울진군 북면 공비침투 현장에 도착했다.

마을 사람들을 만나 상황취재를 한 후 지서로 달려갔다. 치안국에 출입하는 기자라고 위장했다. 지서장은 오늘 새벽 해안으로 침투한 무장공비는 외딴마을 전병두씨 등 3명의 주민과 우체부 강대희씨를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산으로 도주했다고 분노를 토했다.

나는 기사송고를 하기 위해 울진 시내 우체국으로 달려갔다. 우체국에는 기자들로 대혼잡을 이루고 있었으며, 마감시간에 쫓긴 기자들의 송고 현장은 마치 경매장을 방불케 했다.

서울~울진간 시외전화 회선이 부족한 데다 심한 잡음 때문에 몇 번씩 반복하면서 큰 소리를 질러야 상대방이 겨우 알아 들을 수 있었다.

기라성같은 일간지 기자들이 온갖 고생을 해가며 취재한 내용을 귀동냥하여 종합적인 취재를 할 수 있었다. 행운이었다.

기사를 작성하여 보도국에 첫 송고를 했다. 나는 다시 울진지구 공비토벌 소탕작전 상황실로 달려갔다. 북쪽으로 도주하는 무장공비를 따라 지금의 태백시인 장성경찰서 상횡실로 취재진도 옮겨갔다.

공비 소탕작전은 11월 3일 시작 1개월이 지나는 동안 삼척, 평창, 정선, 강릉지역에서 군경 및 향토예비군의 공조 체계가 잘 이루어져 험준한 산악지역의 지형지물에 익숙한 이점을 최대로 이용, 무장공비 통과예상지점에 매복하는 작전과 주민 신고정신이 합쳐져 큰 전과를 올리고 있었다.

대간첩작전본부는 26일 군 작전 중에 무장공비 정동춘(당시 나이 24세)을 생포했는 데, 정동춘은 울진. 삼척지구 침투공비는 모두 120명이며 15명을 1개로 하여 8개조로 편성했다고 밝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30일 새벽 강릉경찰서 상황실에서 상보가 날라왔다. 찬바람이 몰아친 새벽 식사도 못한채 대관령을 넘어 평창군 진부면 월정리 상원사로 향했다.

월정사 진입로 입구까지 왔으나 교량이 붕괴되어 도보로 12km를 걷기 시작했다. 상원사에 도착할 무렵 요란한 총성과 포탄이 터지는 등 치열한 격전이 시작되었다.

상원사에 도착한 기자들은 월용스님 등과 기자회견을 했는 데, 맨 앞자리에 자리잡은 나는 마이크를 스님 앞에 바싹대는 순간 스님은 기자회견을 거절했다.

기자들은 나 때문에 취재에 방해가 된다며 마이크를 치우라는 고함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하는 수 없이 포기했다. 무장공비는 라디오를 휴대하고 있기에 보복이 두려워서였다.

회견이 끝나자 기자들은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고,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눈앞이 깜깜했다. 나는 자리를 뜨는 스님들을 원망스럽고 야속스러운 눈으로 주시하면서 뒤따라 가기 시작했다.

순간 무언가 머릿속에 스쳐가는 옛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스님, 스님, 혹시 해병대 하사관 학교...” 하는 순간 스님은 뒤돌아 보며 미소를 지으면서 “기역력이 무척 좋습니다”하며 반겼다.

“선배님 좀 도와주십시오”하며 마이크를 치켜 올리자 따라 오라는 손짓을 하며 주위를 살피더니 쏜살같이 스님들이 기거하는 방으로 들어갔다.

1968년 11월 29일밤 9시 30분경 공비 7명이 들이닥쳐 총으로 위협, 지녁밥을 지억먹은 다음 말을 고고분 듣지않는다고 이평능승이란 보살을 산기슭에 끌고가 노끈으로 목을 매어 죽이고, 충남에서 재수공부하러 상원사에 온 최대규(당시 21세)군을 짐꾼으로 강제 납치, 식량과 옷가지를 약탈해 도주했다는 만행을 녹음기에 생생하게 담을 수 있었다.

나는 ‘특종, 특종을 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밖으로 나왔다. 교전을 여전히 치열했다. 나는 순간 격전의 총성도 녹음기에 담아야겠다는 욕심이 발동했다. 총탄이 날아오는 위험을 무릅쓰고 해발 1030m인 중봉을 향해 정신없이 뛰었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부상병이 들것에 실려 내려오고 있었다. 한참 올라가는 데 교전중이던 수색대원이 위험하다며 통제했다. 나는 바닥에 엎드려 마이크를 높이 올려 생생한 격전 녹음을 7분가량 담은 데 성공했다.

부상병을 부축하며 하산하다가 위조지폐 몇 장을 주워 신고하기도 했다. 긴장이 차츰 풀리자 배가 몹시 고파왔다. 먹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마침 독가촌(獨家村) 추녀밑에 매달아 놓은 종자 옥수수 몇 개를 입어 넣어 불려서 씹어먹고 개울물을 마시며 허기를 달랬다.

강릉MBC에 들어와 녹음테이프를 방송부에 넘겨주고 기사를 작성, 서울MBC 보도국에 송고했다. 데스크는 몹시 흥분했는지 박근숙 부국장이 전화를 연결했다.

“박기자, 참 수고 많았소” 칭찬이 내포된 격려였다. 나는 어깨가 으쓱해지고 고생스러웠던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 같았다.

1290Khz 라디오 주파수를 고정시켰다. 드디어 저녁 7시 MBC 뉴스의 광장 시보가 울렸다.

무장공비 OO작전지구에서 박명근 기자의 보도...(총성과 폭파음이 울리는 격전의 현장음을 백으로 깔았다)... 아나운서의 보도에 이어 무장공비 잔당을 쫓고 있는 우리 합동수색대는 이 교전에서 O명을 사살하는 등의 전과를 올렸다.

상원사에서 무장공비의 만행을 담은 생생한 녹음이 전파를 타고 전국에 메아리쳤다. 대간첩작전본부는 12월 21일 강릉시 연곡면 삼산리 소금강 뒷산에서 4명을 사살함으로써 작전 52일만에 120명 침투 무장공비 중 정동춘 등 생포 5명, 고동운, 김익풍 등 2명이 자수했고, 113명을 사살함으로써 작전이 모두 끝났다고 발표했다.

취재기간 동안 나는 빈약한 기동력, 기자 지원없는 악조건 속에서 타 경쟁사보다 앞질러 열심히 뛰었다고 자부하며, 그 때를 지금 돌이켜 보면 울진. 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 사건은 기자라는 매력을 평생 직업으로 선택하게 한 동기가 됐다.

박 명 근 <前 강릉MBC 부국장(속초지사장), 現 (사)해병전우회 고문, (사)대한언론인회 복지기금 관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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