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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 박명근 고문님의 <‘老 기자’의 취재 비망록>울진. 삼척지구 무장공비추적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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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장(박경순) 작성일 2009-02-03 10:33 댓글 0건 조회 3,31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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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老 기자’의 취재 비망록>울진. 삼척지구 무장공비추적기(2)
“북의 만행에 의한 양민학살을 ‘전교조’ 등이 이념의 도구로 활용해서는 안될 일”
 
옛것을 익히고 새것을 알려고 하는 인간은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면서 그 어떤 갈구 속에 풍성한 삶을 찾고자 직업전선에 뛰어든다.

서울MBC에 입사한지 2년 3개월 밖에 안된 필자에게는 큰 사건이 발생한 현장에 뛰어든다는 것은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다.

울진·삼척지구 무장공비 소탕작전에 이 분을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학암(鶴岩) 김남석’

강릉출신으로 강원대학교 행정대학원을 수료했으며, 고성. 정선. 강릉경찰서장을 역임했는 데, 월간 한국수필의 신인상으로 등단했고, 수필집 ‘순라꾼의 넋두리’(수사사례집)의 저서를 펴내기도 했다.

학암 김남석은 필자와 강릉농공고교 26기 동창이다.

학암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찰의 길로 들어서 순경에서부터 시작하여 경찰의 꽃이라 일컫는 총경(總警)까지 올라 고향인 강릉경찰서장으로 정년을 마친 인물이다.

필자는 부산에서 대학을 나와 해병대에서 전역 후 1966년 MBC 보도부 기자로 언론계에 투신하여 1995년 국장급으로 강릉MBC 1기로 정년을 맞았었다.

학암과 필자는 ‘농사는 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이다’란 뜻을 품고 농고에 입학했다. 우리는 영농실습을 위해 인분(人糞)통을 지고 다녔으니 ‘이봐 똥통’이라 놀려데도 화를 내지 않고 당연하게 받아 들였다.

두 사람은 전공가 거리가 먼 경찰과 기자란 직업을 선택했으니 출세아닌 출세를 한 것일까?

지난해 5월 중순 춘천세종호텔 커피숍에서 두 번째 수필집을 받아보고 우리 두 사람의 인연은 우연이 아니였다고 생각했다.

울진. 삼척지구 무장공비 소탕작전에 함께 투입돼 50여일동안 각자 맡은 분야는 달랐지만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

여기에 학암 김남석의 수필집을 요약해 소개하고자 하며, 당시 무장공비 정동춘을 생포하여 심문한 김남석 명수사관의 회고담을 40년이 지난 지금에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1968년 11월 9일 오후 5시 30분경 최초로 무장공비 1명이 생포되어 경찰 전방지휘소가 있는 장성경찰서(지금의 태백시)로 연행됐다.

이때까지 언론보도는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침투공비 수는 15명이내라고 발표하였다가 또다시 30명이 침투했다는 등 보도에 일관성이 없었다.

 
◇ 무장공비로 노획한 무기들, 당시 MBC보도국 소속으로 52일간 종군취재를 했던 필자(오른쪽)와 백기홍 부장 ⓒ박명근

이후 오랜시간이 경과해서도 아무런 성과가 나타나지 않아 생포한 공비의 심문(審問)은 전략(戰略)심문으로 경험이 많은 자가 아니면 바른 대답을 받아낼 수 없자, 당시 경찰은 대공(對共)관계자로 유능한 정보과와 수사과, 정보부 요원, 36사단 보안대 등 5명의 수사관이 생포자를 상대로 심도있는 심문을 했으나,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이때 투입된 김남석 경사는 계급장을 떼고 심문장에 들어섰다. 체포된 무장공비는 양손에 수갑을 채우고 5명이 둘러싸고 앉아서 진술을 강요했으나, 답변은 건성으로 일관했다.

김 수사관은 "동무 이름이 무엇입니까?" 하니 "정ㅇㅇ"이라고만 답을 했다. 그 이름은 지금까지의 물음에 대답하던 이름이였다.

김 수사관은 다시 물었다. "지금 말한 이름이 공작명이니 본명을 말하시오" 라고 다시 물었더니 그는 김 수사관의 얼굴을 쳐다봤다.

"본명을 말하라"고 다시 물으니 그는 그제서야 "정동춘"이라고 자기 이름을 바로 진술했다.

여태까지 심문하던 수사관들은 공작명이 있는지 모르고 물었다. 정보과장이 수사관들의 중앙에 앉자 있다가 일어나 김 수사관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심문이 시작됐다.

김 수사관은 "동무들은 원산초대소에서 수용되었다가 공작선을 타지 않았으냐", "초대소내 책상에 조선노동당사(史) 김일성전집 다음으로 모택동전집이 비치되어 있지 않느냐?", "타고 온 공작선의 갑판위에는 고기잡는 그물로 위장하지 않했느냐?" 며, 출발지점과 타고 온 공작선의 모습을 소상히 말했더니 비로소 대답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최초의 생포자 정동춘의 1차 전략심문을 담당하여 그들의 기본임무와 부과임무 및 침투사항, 침투인원을 최초로 파악했다.

마음을 안정시키려고 진땀을 흘리는 그에게 콜라 1병을 보는 앞에서 따 두 컵으로 부어 먼저 먹는 것을 보고 그도 따라 마셨다. 잠시 휴식을 취한 그는 마음이 안정되었는지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정동춘은 침투한 무장공비는 1개조 15명씩 8개조로 모두 120명이 경북 울진해안에 상륙했다고 자백했다.

* * *

무장공비의 잔인무도한 만행을 다시한번 밝히고자 한다. 북상하던 무장공비는 삼척군 하장면 중봉산 독가촌(獨家村)에 잡입, 된장과 고추장, 옷, 식량 등을 훔쳤는 데, 빨간 고추장을 먹어보니 난생처음 접하는 맛이였고, 빨래줄에 널려 있는 군복하의를 보았다.

무장공비들은 "이것은 산골에 파견되어 있는 밀정(정보원)이다. 그러지 않고서 어찌 고급식품인 장을 담가 먹는가. 군관이 입는 군복이 아닌가. 이들을 처단해야 한다" 라며, 다음날 밤에 다시 그 집에가서 일가족을 살해했다. 이런 사실은 북으로 도주하던 그들의 일기를 기록한 소지품에서 밝혀진 내용이다.

무장공비들은 산골에서 고추장을 담가 먹는 것을 몰랐다. 또 당시에는 군에 갔다 온 사람은 군복바지 한 두벌은 누구나 집에 있다는 것을 몰랐다. 이렇게 남한의 실정을 모르고 산속에 살던 무고한 사람들을 밀정으로 오인해 참살한 것이다.

경릉경찰서 작전상황실에 무장공비 신고가 또 접수되어 필자는 현장으로 달려갔다.

 
◇ 이승복 가족들이 살았던 당시의 가옥 ⓒ 박명근

12월 9일 오후 7시경 평창군 진부면 속사리 독가촌에 무장공비 5명이 침입, 호롱불밑에서 공부를 하고 있던 속사초등학교 개방분교 2학년 이승복(9세)에게 "북한이 좋느냐? 남한이 좋느냐" 라고 물었다.

승복군은 북한공산당은 거짓말쟁이라며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하자 대검으로 가슴을 마구 찌르고, 이어 승주(7세), 승자(4세) 두 동생과 어머니 주대하(34세)씨 등 4명을 무자비하게 참살했고, 형 학관(15세)군은 전신에 무려 36군데나 찔렀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이때 살아난 학관(57)씨는 현재 한국전력 영동화력발전소에 근무하고 있다.

필자는 조선일보 강인원, 이동욱기자와 고인이 된 중앙일보 임병돈기자, 한국일보 구용서기자와 함께 참살당한 현장을 보는 순간 “같은 민족끼리 어찌 이럴 수가 있을까”하는 분노와 울분이 솟구쳐 올랐다.

이승복군이 "공산당이 싫다" 고 한 것은 이념의 허실을 알고 한 말이 아니다. 선생님께 배운대로 용기있게 말했을 뿐이다. 그때의 선생은 이승복같이 영민한 어린이를 길렀다.

그런데 지금의 전교조 선생들은 어떤가. 우리들의 귀여운 자녀들을 민족과 통일이란 환상적인 말을 앞세워 새로운 이념의 허수아비 도구로 만들어 우리의 정통성을 비하(卑下)하고 북의 체제를 미화하고 공산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켜준 미국을 미워하게 만들려고 하지 않는가?

선진국에서 시들해진 이념의 잔재(殘在)를 뒤집어 쓰게 하여 몽롱한 정신으로 뒷걸음치게 한다고 생각한다. 바로 전교조 선생들은 자유대한에서 자유를 만끽하며 자라서 그 자유스러운 사회분위기를 이용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희석시키고 있다.

필자는 오늘의 현실을 생각하면 참담하고 오한을 느끼게 한다. 이렇게 확인된 사실인 이승복군의 죽음을 의식화된 층에서 현장을 직접 취재하지 않고 허위보도라고 대도시에서 사진을 전시하며 아우성을 치던 소란도 법원의 심판으로 겨우 사실임을 확인해야 하는 것이 딱한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는 삐뚤어진 이념의 청산으로 대한민국의 정통성 회복과 나아가 발전, 번영을 달성시키기 위해 이들의 온상부터 뿌리채 뽑아내는 데 다함께 앞장서자고 힘차게 외치고자 한다.

박 명 근 <前 강릉MBC 부국장(속초지사장), 現 (사)해병전우회 고문, (사)대한언론인회 복지기금 관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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