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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장봉 옹달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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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장봉 옹달샘
옹달샘
시인 초영 권순성
태장봉 기슭에
아주 작은 옹달샘
언제부터 일까?
쉼 없이 솟아나는
그 옹달샘
계절에 따라
차고 시원하고
따스한 맛의
그 옹달샘
나 어릴쩍
삼복더위 점심때
주전자 하나들고
샘물 뜨러가
그때 마시던 그 물맛
지금도 뇌리에서
살아지지 않는다.
아 그립다!
그 옹달샘물
지금은 어떻게
변했을까?
34회 권순성 선배님이 옥작 시 한편이다.
멀리서 가져 온 것도 아니고 34회 기별게시판에 올려진 것을 여기로 옮겨 온 것이다.
노익장을 과시하면서 이렇게 우리 정서가 흠뻑 젖어있는 옥작을 지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본다.
이 시에 나온 것처럼 태장봉이라는 산은 강릉지방법원에서 사천쪽으로 조금 가다보면 신호등이
하나 보이고 그걸 지나면 이내 왼편에 강원(구 태장봉) 주유소가 나온다.
거기서 서쪽으로 바라다보면 그럴싸한 산봉우리가 하나 보이는데 그게 태장봉(해발 108m)이라 한다.
설악산은 많이 가 봤어도 태장봉은 코앞에 있으면서 가보지 못한 산봉우리 일는지고 모른다.
그 높이를 가늠하기 어렵다면 모산에 가면 모산봉이 있다.
그 봉우리와 높이가 비슷하다고 보면 얼추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태장봉의 물줄기를 이어받아 그 아래쪽에 옹달샘물이 솟아오르던 곳이 있었다.
구 태장봉 주유소 바로 옆 작은 산자락 밑에 샘물이 솟아올랐는데 그 물은 주변에 사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걸 아는 사람들은 멀리서도 그 물을 길러다 먹었다고 한다.
저는 그 물 맛은 본 적 없지만 거기에 샘물이 솟아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애용한다는 설은 들은 바
있었다.
지금은 삼다수니 평창샘물이니 하면서 페트병에 생수를 넣어서 팔아먹는 시대에 들어왔다.
돈 주고 물을 사 먹는다는 것은 상상의 세계에서나 있을 법 한 일이었으나 이제는 생수를 돈 주고
사 먹지 않은 자가 이상한 사람으로 전락된 세상에 온 것이다.
옛날에도 물을 가지고 장사를 했던 역사는 있었다.
대동강 물을 팔아먹었던 봉이 김선달의 사례가 대표적인 예가 아닐는지 모르겠다.
또한 “북청 물장수”라는 말도 많이 들어 보았을 것이다.
김동환 시인이 지은 ‘북청 물장수’로 인하여 더 많이 알려졌지만 실제 서울에서 아침마다 물을
길러다 판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북청에서 온 사람들이 서울에 상수도가 제대로 구비되지 않았던 시절에 샘물을 퍼다 장사를
했다는 것이다.
과거 시골 촌락에 상수도가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에는 동네에 공동 우물이 있었다.
당시에 우물은 지형적으로 샘물이 솟아나기 쉬운 움푹 빠진 곳에서 땅을 파서 만들었다.
스며든 물이 솟아 나는 지형이다보니 물뿐만 아니라 인간과 가축이 배설한 온갖 오물들이 다
스며들었다가 다시 나오게 되는 구조가 되어 버린 것이다.
게다가 지금처럼 위생시설이 철저하게 완비되지 않았던 시절에다 위생 개념까지 체계화 되지
않았었다고 본다.
당시에는 미생물과 관련된 과학도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인지라 그 안에 인간에게 유해한
병균들이 우글거렸다는 것을 알 리 없었을 것이다.
당시에 수인성 질병이었던 콜레라나 이질 같은 경우 마을에서 한 명 만 걸리면 그 주변 사람
들은 죄다 그 질병에 걸려 같이 고생했던 시절도 있었다.
그런 현상이 발생한 것도 비위생적인 마을 공동우물에 기인했던 아픈 생수의 역사도 있었다는
것이다.
많았던 공동 우물 중에서 훗날까지도 인지도가 높았던 곳이 있었다.
상수도가 보급되면서 대부분의 공동우물은 사라졌지만 샘물이 나는 곳은 성시를 이루는 곳도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회산 입구에 있는 처음처럼 소주 공장에서 제공하는 지하 청정수일 것이다.
그 물도 한 때엔 폐쇄를 시켰는데 지금은 어떤지 잘 모르겠다.
여기에서 언급되었던 태장봉 샘물도 어느 시대까지는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아 오던
약수터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근대에 들어와 페트병 생수가 나오면서부터 기존의 샘물이나 약수터는 점점 쇠락해 가는
추세이다.
위생상 문제도 있고 공동 우물 관리도 체계적으로 해야 함으로 그런 번거로운 과정까지
감수하면서 운영하는데 부담을 느꼈을 것이다.
태장봉 샘물도 시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결국을 문을 닫게 되었다고 본다.
그래도 그 그루터기는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물론 물이 나오지 않음으로 받으러 오는 사람 또한 없다.
그렇지만 옛날에 애환을 그대로 보여주는 우물터 형체는 남아 있었다.
이 또한 언젠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야트막한 산자락 밑에 있는지라 그 산도 개발의 명목에 들어가면 한 방에 사라질 땅처럼
보여졌다.
34회 권순성 선배님의 애환과 추억이 묻어났던 태장봉 약수터를 우정 방문하여 사진까지
찍어 왔다.
참고로 샘물 수도꼭지 밑에 붙혀 놓은 문구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져 있더군요.
"이곳은 개인 사유지로서 주인 허락없이 사용을 금지합니다.
물을 마시거나 가져가지 마세요.
주인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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