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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지인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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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규전50 작성일 2025-03-14 18:12 댓글 0건 조회 1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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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지인의 죽음

 

 

인간사에서 죽음만큼 충격인 일도 없을 것이다.

내가 죽던 아니면 남이 죽던간에 죽는다는 것은 인간 세계에서 가장 큰 슬픈 업 중에 하나일

 것이다.

죽음보다 더 큰 일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난 자 중에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죽음이라는 길로 들어서지 않았던 사람은

 아직까지 아무도 없었다.

누구나 죽지만 그 죽음에 대해서 늘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세상인지도

 모른다.

 

죽음 자체가 워낙 준엄한 관계로 그 자체가 가지는 중량감은 그 무엇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크다고 본다.

죽음은 곧 삶이 끝난다는 것으로 모든 것이 종료된다는 의미를 가질 것이다.

심지어 법적으로 큰 문제시 되는 것도 죽음에 이르면 공소가 소멸되도록 만들어져 있다.

삼천갑자 동방삭이나 영원불멸을 추구했던 진시황도 죽음 앞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을 보아도

 죽음이 얼마나 준엄한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자고로 핑계 없는 무덤 없다고 했다.

원인이나 이유 없는 죽음 없고 억울하지 않은 죽음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아름다운 죽음이라는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너무나 큰 허망함을 조금이나마 달래주기 위하여 아름다움이라는 포장을 살짝 해 주었을 

뿐이라 생각된다.

죽음이란 영원한 이별에 긍정적인 생각을 곁들이고 싶은 마음이야 백분 이해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원초적으로 없다고 볼 때 어떻게 죽느냐도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인명은 재천(在天)이라고,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이루어지는 것이라 믿고 있을 것이다.

하늘이 하는 일을 인간이 어떻게 통제할 수 있겠냐는 말일 것이다.

그렇다면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경우엔 하늘과 관계없지 않느냐고 말 할 수 있겠지만 이 또한

 종국에는 하늘의 뜻이 아니겠느냐.

 

죽음에 원인은 많다고 본다.

본이 아니게 죽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본과 상통하여 죽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죽음은 언젠가는 맞이하지만 그 방법과 시기는 본인의 의지와 관련이 약간은 있을 수 도 

있을 것이다.

오래 살기 위하여 죽음과 관련되는 행위를 하지 않는 사람은 대충대충 사는 사람에 비해서

 조금의 생명 연장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조금은 더 살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결국 그 자체도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를

 일이다.

 

일전에 나의 지인이 저승으로 홀연히 가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큰 충격에 빠졌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많은 지인들을 만나고 헤어졌지만 이 분의 죽음은 좀 더 다른 

방향으로 다가온다.

생각과 사고방식의 결이 나와 상통했던 분이셨다.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는 것이 사람 살아가는 과정일 것이다.

그 와중에서 나와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대단한 행운이 아닐 수 없다고 본다.

 

그냥 자식이나 부모관계처럼 운명적으로 만나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배우자나 친구처럼

 우연이나 필연적으로 만날 수 도 있을 것이다.

그 만남을 통하여 우리네 인생이 엮기는 것인데 거기서 자신의 뜻과 부합하는 사람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는 것도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본다.

예전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돌아가셨을 때 김대중 전 대통령은 그의 죽음에 대하여 자신의 

반쪽이 떨어져 나가는 듯 한 고통이 왔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나와 사회적 친분이 있었던 한 분이 나의 곁을 떠났다고 하니 가슴이 아프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도 갑자기 유명을 달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의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몇 달 전에도 만나서 서로가 교감을 통하던 사이었었는데 그 사이에 이승을 떠났다고 하니 

더더욱 만감이 교차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분이 저승으로 간 사연 또한 허망하지 않을 수 없는 일로 연유되었다고 하였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을 하던 분이었었는데 그 업을 이루지도 못하고 이승을 하직한 것이다.

옛날 중국의 성현이었던 공자님은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朝聞道이면 夕死可也.”

해석한다면 아침에 도(세상에 근본 이치)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라는 이야기란다.

이를 자의적으로 해석해 본다면 도를 듣는다는 것은 죽는 것 보다 어렵다는 뜻일 수 도 

있다는 것이다.

 

죽은 나의 지인은 공자님 같은 철학자는 아니다.

그냥 창의성과 도전정신이 남보다 좀 더 강한 분이셨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세계를 존재할 수 있도록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고 애를 쓰셨던 

분이셨다.

자신이 추구하던 로망이자 업을 달성하기 위하여 애쓰고 노력하던 차에 금전적 한계를 

넘지 못하고 저승으로 가 버린 것이다.

 

한 인간이 타인에게 인상적인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은 용이치 않다고 본다.

노벨상을 타거나 올림픽 같은데서 스타덤에 올라간다면 많은 사람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거창하지 않은데서 타인에게 감동과 공감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은 더더욱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시인 안도현의 싯귀가 문득 뇌리를 스친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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