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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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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규전50 작성일 2025-03-05 10:38 댓글 0건 조회 11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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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 아버지

 

난 아버지처럼 안살아.”라는 말을 안 외쳐 보고 지금까지 산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본다.

특히 베이비부머 시대에 태어났던 사람들은 아버지 시대에 어려웠던 상황을 직접 체험한지라 

더욱더 그런 말이 많이 나오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오륙십년 전에 살았던 아버지들의 인생은 그야말로 어렵고 힘들고 고된 인생 역정의 결정판이었다.

먹은 것은 쥐뿔도 없고 아이들은 대추나무 비닐 매 달리 듯 주렁주렁 달려있고, 할 일이라곤 농사일

 이외엔 거의 보이지 않았던 시절이다.

아무리 뼈 빠지게 일을 해도 입에 풀칠하기 바쁜 세상이었다.

농사일이라도 자기 땅이 있으면 그래도 마음이라도 편했을는지 모르지만 남의 땅이나 머슴과

 진배없는 일을 한 사람도 부지기수였으리라 본다.

 

 

지금처럼 사람 살아가는 세부적인 환경이 쾌적했던 시절도 아니었다.

물론 하늘에 떠 있는 공기는 지금보다 훨씬 더 깨끗했지만 집안에서 벌어지는 각종 일상생활에는 

더럽고 지저분하고 구질구질하기 그지없던 시절이었다.

특히 농사를 짓는 집에서는 정지(부엌)깐과 마굿간이 붙어 있어서 위생적으로도 불결하기 그지없었다.

여름철이면 시커먼 왕파리들이 밥상에 벌떼처럼 몰려왔고 장마철이면 정낭(푸세식 화장실)에서 구더기가

 스멀스멀 기어 나와 온 집안을 휘젓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그 이외에 생쥐, 노내기, 개미, 지네, 지렁이, 돈벌레, 모기가 들끓는 것은 기본이고 담장에는 뱀까지

 스륵스륵 기어 다녔던 기억도 생생하다.

 

 

저도 집이 구정 마가리쪽에 있다 보니 시골생활에 전형을 보면서 자랐다.

장가를 갔을 때에도 집집마다 소를 한두 마리씩 키우던 시절이었다.

한 번은 제 처와 같이 밭에 갔다 오는데 중간에 우사를 지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우사에 있던 파리들이 제 처 등짝에 새카맣게 붙어서 따라 오는 것이 아닌가.

당시에 흰색 옷을 입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파리도 환한 색을 본 적 없던 차에 흰색 옷을 보고 환장을 

하면서 달라붙었지 않았나 싶기도 하였다.

 

 

물론 우리 집만 그렇게 구차하고 구질구질하게 살았던 것은 아니다.

옆집도 그랬고 앞집도 그랬다.

위생개념이라곤 별로 신경을 못 썼던 시절이었다.

혹시나 자연부락에서 누군가가 코레라라도 걸렸다면 며칠 후 전 마을 사람들이 죄다 그것에 

걸려서 동시에 죽을 고생을 했던 시절이었다.

 

 

일상생활도 단조로웠다.

밥 먹고 농사일하고 집에 들어와 소 여물주고 텔레비전도 없던 시절이라 라디오 정도 듣다가 

잠자는 일로 일관하였다.

농사일은 지금처럼 트랙터나 경운기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죄다 지게나 보그래를 가지고 밭갈고

 거름 나르던 시절이었다.

농사를 지어서 가족들이 입에 풀칠만 할 수 있으면 만족하던 시절이었다.

 

 

모든 것은 자급자족으로 이루어졌다.

집도 손수 지었고 지어진 집의 관리도 집 주인이 손수 하던 시절이었다.

이러다 보니 시골에 일상사는 죄다 몸으로 때우면서 살아갈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용역을 주고 싶어도 돈이 없기에 그런 엄두도 못 내었다.

그래도 혼자 할 수 없으면 품앗이로 서로 도와가면서 큰일을 치러내던 시절이었다.

 

 

서두가 너무 길어진 것 같다.

옛날 생각을 다시 떠 올리면서 글을 쓰다 보니 아버지와 어머니 생각이 굴뚝같이 떠오른다.

이미 두 분은 저승에 가 계시고 나도 어느 날 고아가 되었는데 이제 저승 갈 준비를 해야 할 

나이가 되고나니 만감이 교차된다.

 

 

저의 집은 종손은 아니지만 우리 아버지가 지손에 맏이가 되다보니 제사도 많았다.

죽어나는 것은 우리 어머니였다.

지금처럼 돈도 있고 차량도 있다면 제사상에 올라갈 식재료를 가져다 지지고 볶아서 제사상에

 올려놓으면 되겠지만 예전에는 없는 돈을 억지로 만들어 편도 2시간 이상을 걸어서 장을 봐서 

조상을 모셨다.

결국은 번 한 날 한 번 못 보시고 저승에 가신 것이 너무나 안타까울 뿐이다.

 

 

그 와중에 제사상에 올려야 할 과일 중에 좀 고약한 것이 밤이었다.

다른 과일은 그냥 깎거나 삦어서 제사상에 올려놓으면 된다.

하지만 밤은 딱딱한 겉껍질을 벗기고 그 안에 단단한 속껍질도 깎아야 하는데 이게 말처럼 쉽지 않다.

몇 개만 까다 보면 손아귀가 얼얼할 정도로 힘들면서 시간도 많이 소모된다.

그래도 시골이다 보니 생밤은 자급자족할 수 있었다.

제사상에 올리는 밤을 깎는 일은 우리 아버지 몫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자란 저는 제사를 물려받는다 하여도 울 아버지처럼 밤은 안 깎을 꺼야를 

뇌까리면서 컸다.

제가 장남이 되다 보니 나이를 먹고 자연스럽게 제사를 물려받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방안에서 우리 아버지와 똑 같은 자세로 밤을 까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였다.

 

 

저도 조그마한 농장을 하나 가지고 있다 보니 갖은 일을 다 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농장 일을 하기 위하여 필요한 도구가 의외로 많다.

, 괭이, , 호미, , 망치, 니퍼, 지렛대, 해머, 펜치 같은 소소한 도구는 필수품이나 

마찬가지다.

대부분 구입하여 날이 빼물어지거나 망가지면 그냥 버리게 된다.

 

 

그런데 버리기에는 아깝고 쓰자니 날이 서지 않아 작업성이 떨어지는 도구가 바로 톱이다.

요즘 나오는 새 톱은 진짜 잘 썰린다.

그런데 몇 번 사용하다가 여름 장마철만 지나고 나면 녹이 슬면서 작업효율이 뚝 떨어진다.

그럴 때마다 새 톱을 사서 사용하곤 하다 보니 주변에 널브러져 있는 것이 헌 톱이 되어 버렸다.

해서 옛날 우리 아버지가 했던 방식으로 줄을 사다가 톱날을 쓸어 보았다.

해 본 적은 없지만 아버지의 방식을 연상하면서 톱날을 쓸어 보니까 그런대로 날이 서긴 섰다.

물론 처음에는 날 세우기가 여의치 않아서 시행착오를 좀 거쳤는데 몇 번 하다 보니 요령이 생겼다.

단 쓴 다음 시운전도 해 보았는데 전에 날이 빼물었을 때보다 훨씬 더 부드럽게 잘 나가는 것 같다.

 

 

톱 쓰는 순간에는 더더욱 울 아버지가 나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같이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우리 아버지의 옛날 모습이 그대로 머릿속에 떠오르고 있다.

그러고 보니 내 자식에겐 내게 물려줄 추억이 무엇인지 선뜻 떠오르지 않는다.

추억이란 거창한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 글을 쓰면서 인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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