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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 문화예술
『도문대작 21』 -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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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0년 12월 29일, 한 죄수가 탄 호송수레가 한양을 출발했다. 그리고 보름여 후인 1611년 1월 15일 귀양지 함열(咸悅)에 도착한다. 칼바람 부는 한겨울의 유배지, 오랜 전란으로 나라도 백성도 궁핍했던 시기였다.
그는 그에게 닥친 고난을 기회로 삼는 특출한 재주를 가진 위인이었다. 이때도 그의 천재성은 유감없이 발휘된다. 더구나 유배지에서 배고픔과 추위의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무언가 꾸준히 움직여야 했다. 그는 서당을 열어 주변의 아이들을 가르치고, 한 가지라도 더 후세를 위해 기록을 남기는 일에 착수한다. 영어의 몸으로 그가 할 수 있었던 일이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배가 고플수록 피하고 싶은 상상들이 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그것을 밖으로 끄집어 내어 허기를 채웠다. 강릉 초당에서 아버진 허엽(許曄, 1517~1580년)이 강문 앞바다에서 길어 올린 바닷물을 간수로 삼아 개발해낸 초당두부부터 어린 시절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강릉 사천의 외할아버지(김광철, 1493~1550년)집에서 맛본 동해안의 갖은 해물과 대관령 줄기에서 채취한 온갖 산야채, 그가 조정의 관리로서 경향 각지의 관아를 다니면서 먹어보았던 지역의 진귀하고도 별난 맛의 음식들을 떠 올렸다.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그런 음식을 상상하는 것은 고문과도 같은 일이었으나 그동안의 기억을 바탕으로 한땀 한땀 기록을 해나갔다. 그리고 한 권의 책으로 완성되자 제호를 붙였으니 바로 ‘도문대작’이다. 그의 나이 43세되는 해였다.
허균은 생전에 총 26권 8책으로 구성된 <성소부부고, 惺所覆瓿藁)>를 편찬했는데, 이 시문집은 시부(詩部), 부부(賦部), 문부(文部), 설부(說部) 등 4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도문대작’은 설부 26권에 수록되어 있다.
‘도문대작’에는 고향 강릉의 방풍죽(防風粥)을 비롯해 엿·두부·다식·정과 등 병이류(餠餌類) 11종, 강릉의 천사배(天賜梨), 전주의 승도(僧桃) 등 과실류 28종, 지금은 어디에 가도 맛볼수 없는 곰의 발바닥(熊掌)·표범의 태(豹胎)·사슴의 혀와 꼬리로 조리한 비주류(飛走類) 6종, 붕어·복어·송어·광어··도루묵·홍합·대하 등 해수족류(海水族類) 46종, 무와 배추 등 소채류 33종 등 총 117종의 식품에 대한 분류와 명칭, 특산지, 요리법, 음식의 생김새와 맛까지 상세히 적혀 있음은 물론 음식마다 역사적 기원까지 꼼꼼히 적혀있어 그의 총명함과 기억력에 혀를 내두를 정도다.
그는 이 책의 서문에서 “우리 집이 비록 가난하기는 했지만, 선친이 생존해 계실 적에 경향 각지에서 기이한 먹거리를 예물로 바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덕으로 나는 어릴 때 온갖 진귀한 음식을 고루 먹을 수 있었다. 결혼 후에는 부유한 처가 덕에 육지와 바다에서 나는 먹거리들을 다 경험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때 전쟁을 피해 강릉 외갓집(사천진리)에서 지냈는데 그곳은 여러 가지 귀한 먹거리들이 많아서 산해진미를 골고루 맛볼 수 있었다. 벼슬길에 나선 뒤로는 공무(公務)로 남북을 오가며 입을 호사시켰으니 맛있는 고기는 물론 먹어보지 않은 산채가 없었다.”라고 적고 있다.
조선천지에 숱한 유배지를 두고 굳이 함열로 보내 달라고 한 것도 그곳에 뱅어와 준치가 많이 난다는 것을 염두에 뒀다는 설인데 “그해 봄에는 (뱅어와 준치가) 일절 나지 않으니 또한 제 운수가 사납습니다.”라고 적은 것을 보면 허균은 미식가(美食家)였거나 탐식가(探食家)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연재에 들어가는 글’이 길어졌다. 하지만 ‘도문대작’이라는 책 제목을 차용하면서 원작자에게 이 정도의 예우는 갖추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는가.
허균이 도문대작을 출간한지 올해로 415년이 되는 해다. 4세기를 넘어 21세기에 허균이 살아있었다면 과연 어떤 ‘도문대작’이 탄생했을까? 허균의 ‘도문대작’을 감히 흉내 낼 수는 없지만 그의 이름을 걸고 21세기를 상징하는 21을 붙인 후 현대판 ‘도문대작 21’을 쓰기 위해 곧 길을 나선다.
덧붙일 말은 ‘최돈열 교수의 도문대작 21’ 라는 겸손치 못한 제호는 필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출판을 선 계약한 한 커뮤니티의 권유에 의한 것임을 밝힌다.
가까이는 강릉의 고유 맛집으로 시작해서 조선 8도의 신비롭고도 진귀한 맛집을 찾아 천천히 길을 떠나보기로 한다.
게재하는 동안 부족함이 많겠지만 많은 관심과 응원을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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