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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 문화예술
『도문대작 21』 -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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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를 시작하면서》
지난해 허균의 여동생 허초희(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를 시작으로 허균의 일생을 살펴 연재하는 과정에서 언급하지 않은 것이 있었으니 그가 쓴 여러 저서 중 ‘도문대작(屠門大嚼)’에 관한 것이었다. 소중한 사료이기에 언젠가 때가 오면 아껴 쓰려고 의도적으로 감춰 뒀던 것이다.
세기의 풍운아라는 수식이 붙을 만큼 시대의 거친 비바람 속을 거침없이 달린 인물 허균(許筠, 1569~1618), 그는 강릉이 낳은 천재적 실학자이자 개혁적 사상가이며 당대의 문장가였다.
허균만큼 학문과 사상, 행동에 있어 자유분방하면서도 질곡의 삶을 산 인물이 또 있을까. 예(禮)를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숭상하는 성리학의 엄격한 풍조를 비웃듯 그가 발걸음을 하는 곳 마다에는 범인(凡人)들은 상상도 못할 기상천외한 사건이 발생하고, 새로운 기록들이 탄생하는가 하면, 선을 넘는 풍류와 낭만과 문장들이 넘쳐났다.
조선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도 그의 넘치는 상상력과 부지런한 수족을 통해 탄생했으며, ‘도문대작’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요리사는 더더욱 아니고, 식도락가였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그 시대에 음식과 관련한 글을 쓴 발상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도문대작’의 뜻은 ‘푸줏간 앞을 지나면서 입맛을 다신다’는 의미로 한(漢)나라의 환담(桓譚)이 지은 신론(新論)에 등장하는 말이다. 일찍이 명나라의 문물을 접한 독서광 허균이 이 신론을 읽고 난 후, 조선의 먹거리를 주제로 글을 쓰면서 이 사자성어를 책 제목으로 차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 중기, 나라 살림도 어렵고, 따라서 백성들의 먹거리 사정도 좋을 리가 없었다. 먹을 거리가 없으니 먹는 것을 흉내 내게 되는데 그것을 입맛을 다신다거나 쩝쩝거린다고 했다.
그는 다재다능한 사람이었다.
그는 박학다식한 사람이었다.
그는 동분서주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좌충우돌한 사람이었다.
그는 파란만장한 삶을 산 사람이었다.
먹거리는 인간의 생명이나 다름없다. 궁핍한 당시의 상황에서 허균은 조선 곳곳을 관직을 통해서나, 유배, 파직과 복직을 거듭하며 방랑하면서도 음식을 주제로 한 책을 탄생시켰으니 도대체 그의 가슴과 머릿속에는 무엇이 들어있던 것일까?
그는 20대에 이미 조선이라는 작은 나라의 한낱 관리가 아니었다. 그의 시선(視線)과 사유(思惟), 사상(思想), 문장(文章)은 조선을 넘어 명나라는 물론 일본 등 동아시아를 지향하고 있었다. 늘 조선의 문명을 생각했으며 운명을 걱정했다.
도문대작은 1611년에 지어졌다. 그가 고난을 겪고 있던 시기였다. 밟을수록 더 생존력을 발휘하는 잡초와 같은 근성과 비실용에 대한 저항정신은 오히려 새로운 문화가 되고 기록이 된다.
그가 이 책을 쓰기 한해 전인 1610년은 과거 시험을 관리하는 시관(試官)으로 발령을 받은 해였다. 조정은 여러 가지 겹경사가 발생하자 이를 축하하기 위해 특별히 열린 별시(別試)를 치렀는데 이 시험은 공교롭게도 허균으로 하여금 유배라는 형벌의 길을 걷게 한다.
그는 대독관(對讀官)의 한 사람이 되어 과거 답안지를 채점하면서 자신의 조카와 조카사위를 합격시켰다는 혐의를 받았는데, 사실 여부를 떠나 친인척이 연루되어 있기에 오해를 살만도 했다. 결국 별시 문과의 총책임자가 아니었음에도 그는 모든 혐의를 혼자 뒤집어 쓰고 전라도 함열(지금의 익산)로 유배의 길을 가게 된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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