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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초희(楚姬) - ‘筠’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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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허균은 사형 집행 당일에야 비로소 자신이 처형당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허균은 "나오라는 재촉을 받고서야 비로소 자신이 처형당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소리쳤으나 국청에 참여했던 모두가 외면했으며, 왕도 어찌할 수가 없어서 그들이 하는 대로 맡겨둘 따름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허균은 억울함을 호소하려 했을 것이다. 그 단말마적 외침은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대로 허균의 유언이 됐다. 광해군 10년(1618년) 8월, 그의 나이 50세 되던 해에 모반죄를 쓰고 능지처참을 당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한때 조선 최고로 꼽히던 천재 문장가이자 사상가며 호방했던 외교가 허균의 최후였다. 그는 썩은 정치와 사회를 바로 잡을 수 있는 길은 혁명밖에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균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점은 한둘이 아니다. 허균이 정말로 역모를 꾸몄는지부터 이이첨에게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다가 누명을 쓰고 토사구팽당했다는 설 등이 그것이다. 그의 처형을 두고 당시 조정의 권신이었던 유희분이 죄인에 대한 면밀한 심문도 없고, 죄안(罪案)에 서명하기를 거부했다는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으나 대북파의 권세에 눌려 무산되었다. 한편으로는 늘 호기롭고 파격적인 언행으로 미운털이 박힌 영향도 작용했을 것으로도 유추된다.
<조선왕조실록, 광해군 10년>의 기록에는 "허균은 성품이 사납고 행실이 개, 돼지와 같았다. 윤리를 어지럽히고 음란을 자행하여 인간의 도리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죄인을 잡아서 동쪽의 저잣거리에서 베어 죽이고 다시 기쁨을 누리고자 대사령을 베푸노라." 라는 대목이 나온다.
또 "그는 천지간의 한 괴물이다. 그 몸뚱이를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고 그 고기를 먹어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이다. 그의 일생을 보면 악이란 악은 모두 들어차 있다" 라며 극악무도한 인물로 기술한다.
이 같은 기록은 어딘가 어색하고 미심쩍다. 언사가 지나치면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 이이첨이 그의 교활함을 감추고 자신의 만행을 합리화하기 위해 허균을 ‘천하의 괴물’로 만든 것으로 보이는 기록이다.
균이 아무리 타고난 성정이 때로는 모나고 기행을 저지르고 다녔다고 주변부에서 평가한들 일찍이 사서오경을 통달한 그는 조선 최고의 지식인이었으며, 성리학은 물론 불교와 도교, 심지어 천주교 교리에 이르기까지 신앙에 관심이 컷던 그다. 또 한 명나라를 오가며 견문을 넓히고 명나라의 문사들과 시문을 논하며 학문의 교류를 넓힌 당대 최고의 외교 전문가다. 50년 인생을 통해 인간 된 도리와 사리 분별을 못할 인사는 아니라는 뜻이다.
우선은 살아야 하겠기에 소신을 굽히고 대북파로 행보를 했을 때 정치와 사회 개혁의 꿈을 이루고자 하는 이상과 신념은 가슴속에 감춘 채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상은 현실과 괴리 속에 이용만 당하다가 포부를 펼쳐보지 못하고 비참한 결말을 맞았다.
허균의 시신은 1618년 역모죄로 처형되었을 때 그 누구도 수습할 엄두를 못냈다. 다만 아전 박충남이 저잣거리에 있는 허균의 머리를 가져가 장사를 지내려 했으나 그마저도 여의치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허균의 가묘조차 없다가 조선 시대 내내 존재하지 않았으나 대한제국이 망한 이후인 20세기 초에 들어서야 가묘를 조성할 수 있었다.
역모죄는 3족을 멸하는 조선시대 율법에 따라 균의 후손이 끊긴 것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그의 후손들 중 일부가 다른 문중(허목 봉례공파)에 양자로 가거나 변성명을 하고 다른 사람의 후손으로 등재하여 후손을 이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1980년대에 균의 살아남은 아들 허굉의 직계 자손들이 족보를 통해 허균의 직계 후손임을 주장하여 오다가, 1995년 양천허씨 허추자산공파 세보에 판도좌랑공 11세손 교산공파(蛟山公派)로 혈통을 이어가게 됐다.
조선왕조 500년사에서 가장 호방(豪放)한 선각자였으며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개혁가 허균, 오랜 시간이 흘러서 현대에 이르렀으니, 민본과 민주의 정신으로 새로운 세상을 열려 했던 허균의 행보와 사상은 재평가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나라에서 가장 무서워해야 하는 존재는 백성"이라며 누구보다 백성을 아꼈던 허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는 영원한 강릉인(江陵人)이라는 사실이다.
주)
그의 역작인 홍길동전은 유몽인 등이 자신들의 문집과 서신 등에 홍길동전의 저자가 허균이라는 기록을 남김으로써 후대에 홍길동전의 저자임이 알려지게 되었다. 허균의 문집과 성소부부고 등은 1668년 외손자 이필진이 간행하면서 후세에 전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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