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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초희(楚姬) - ‘筠’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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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면 애일리에 소재한 허균 시비>
여러 기록을 살펴볼 때 그는 분명 강릉 사천면 애일리 외가 김광칠의 터에서 교산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부인할 수 없는 ‘강릉인’이다. 선입견일 수 있지만 ‘강릉사람들’은 보편적으로 대인관계에 있어서 살갑지 못하고 다소 무뚝뚝하다. 특히 강릉인은 사적으로 초당의 선사유적지와 인류학적으로 Y염색체 연구에서 입증되듯이 몽골 등 북방에서 남하한 몽골로이드다. 북방계열의 사람들은 우직하며 이성적 합리적 사고가 부족한 반면 직관력과 창의력은 우수하다 했다.
균은 허엽의 색깔이 다른 두 가계의 영향을 두루 받아서인지 뛰어난 천재성뿐만 아니라 성격이 다소 괴팍하고 때로는 돌출적이면서도 정치적 감각과 수완은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사서삼경을 통달했다고 하나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성이 더 그를 지배했을 수도 있다.
1603년, 춘추관 편수관과 지제교를 겸직하며 지내던 중 균은 조카의 결혼식에 당시의 예복과는 다른 이상야릇한 옷을 입고 왔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집요한 공세를 받았다. 그가 어떤 모양, 어떤 형태의 입성을 했는가에 대해 알 길이 없으나 상상하건대 그에게는 시대를 리드하는 패션감각도 있었던 모양이다.
아마도 당시의 명나라에 영향을 받은 복잡하고 불편한 복장이 아니라 그의 성정처럼 현대의 개량한복 같은 복장을 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할 수 있다. 아무튼 사헌부의 트집이 계속되자 벼슬에 대한 회의를 품고 모든 관직을 뒤로한 채 강릉 외가와 금강산을 오가며 방랑생활을 한다.
역설적이게도 이상한 복장을 하고 조카의 결혼식에 참석한 균에 대한 사헌부관리들의 판단과는 달리 선조는 이를 긍정적으로 보았던가 후일 그를 왕실의 복식을 관장하는 상의원정(尙衣院正/영화 ‘상의원’ 참조. 조선시대 상의원에 소속된 정3품 관직으로 왕실에서 필요로 하는 각종 복식 일체를 관장하며, 재물과 보화를 관리하고 제조하고 공급하던 공조(工曹) 소속의 벼슬에 임명한다.
균은 1604년(선조 37년) 7월에 성균관 전적(典籍)이 되고 같은 해 9월 황해도 수안군수로 임명받아 부임한다. 그러나 암행어사의 암행감찰에서 불교를 숭상했다며 다시 탄핵받아 군수직을 사퇴하고, 균과 같은 날 강원도 흡곡현감으로 발령을 받고 한달 차로 사퇴한 친구 한석봉(본명/韓濩/서예가 · 문신)과 방탕한 생활했는가 싶었는데 한편으로는 이 기간을 이용해 형 봉의 문집 <하곡집(荷谷集)> 두 권을 발간했다. 그와 함께 하루 같이 술을 마셨던 한석봉은 술에 취한 채 나귀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나귀 등에서 떨어져 객사를 한다.
이후 1606년 4월에 원접사(명나라 사신을 멀리까지 나가 맞아들이는 일을 하던 임시직 벼슬) 유근(柳根)의 추천으로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을 영접하는 종사관에 임명되자 주지번과 사서오경 등 고전을 막힘없이 논하고, 재기 넘치는 글로 주지번을 감동시켰다. 균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동안 보관하던 누이 난설헌의 시선집을 주지번에게 주었던 바, 주지번이 초희의 놀라운 시작(詩作)에 감동하여 초희 사후 18년 뒤인 1606년 명나라에서 <난설헌집>이 출간된다.
초희가 스물일곱의 나이에 세상을 뜨면서 자신과 함께 다비(茶毘/인도의 화장법 일종)를 시켜 달라던 육신과도 같은 그녀의 걸작들은 이렇게 오빠 균의 누이에 대한 끝없는 사랑과 그리움, 세심한 배려로 그 일부가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것이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그녀의 불행과 요절도 요절이려니와 짧은 생애에 걸쳐 많은 시를 남겼으나 상당수가 그녀의 다비와 함께 불태워졌을 것으로 생각하니 안타깝고 또 안타까운 일이다.
주)
마침 10월 5일부터 이틀간 허균선양사업회가 주관하는 허균문화제가 초당 생가 일원에서 열린다 합니다. 많은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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