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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초희(楚姬) - ‘筠’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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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희는 성장해서 이미 여덟 살이 되었으니 그렇다 치자. 균은 겨우 두 살 밖에 안되는 갓 태어난 애기인데 과연 어머니 등에 업혀 한성 그 멀고도 먼 길을 힘들여 갔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한성으로 갔다고 한들 한번 강릉으로 내려오려면 같은 고행을 해야 한다. 때문에 균은 너무 어리기에 어미와 강릉 초당에서 얼마간 성장하도록 두고, 멀고 험한 길을 감당할 수 있는 봉과 초희만 데리고 서울로 올라갔을 가능성이 크다.
균이 강릉에서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들을 글로 남긴 것을 보면 초당을 중심으로 반경 10여 리 안팎인 사천과 학산(현 강릉시 구정면 소재)등을 무대로 그의 성향처럼 활기차게 생활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균이 교산(蛟山) 외에 또 하나의 호가 학산(鶴山)이라는 것이 이를 입증한다.
그러나 여러 사료들을 살펴보아도 안타깝게도 태어난 후부터 5세 이전의 행적에 관한 기록을 발견할 수 없다. 4~5세 이전의 기억은 당사자 외의 누군가가 구전이나 기록으로 남기기 전에는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5세 부터 형 허봉과 가까운 손곡(蓀谷) 이달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거나 14세가 되어서야 방랑시인이었던 이달을 만난 것으로 되어있는 등 의견이 분분한데 몇 살의 나이에 학문을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손곡이 당시 원주 손곡리(蓀谷里)에 살았다는 것으로 보아 강릉과 한성의 중간지점이 원주라 손곡의 이달에게서 학문의 첫걸음을 내디딘 것으로 여겨질 뿐이다.
손곡 이달 역시 아버지 이수함(李秀咸)과 홍주 관기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얼자(孼子)로 이로 인해 명석한 머리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신분제도 상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없었던 비운의 인물이었다. 균은 이런 스승의 모습을 보면서, 조선 시대 서얼이 당하는 차별과 부당한 신분제도의 현실을 자각하게 됐을 것이다. 동시에 그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신분에 상관없이 서민을 비롯한 다양한 사람들과 자유분방하게 교류하기 시작했으며, 이를 계기로 비판적 사회관과 부조리한 현실을 타파하려는 반항아적 기질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균은 이후 이복 누나의 남편 추연(秋淵)의 추천으로 당대 대학자 류성룡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性理學)을 배우게 된다.
허균이 쓴 애일당 일기의 일부를 인용해보면 1592년 허균의 나이 23살 되던해 임진왜란 당시 강릉으로 피신하여 외조부 별세 후 33년간 방치된 애일당을 고쳐 모친을 모시고 살았음을 알수 있다. 강릉으로 피신을 했다는 것은 균은 물론 균의 어머니 강릉김씨가 강릉을 떠나 한성에 살았음을 입증하는 대목이다.
"임진년 가을에 나는 왜적을 피해 어머니를 모시고 북쪽으로부터 배를 타고 교산(蛟山)에 닿아 당(堂)을 청소한 뒤 그곳에 거주하였다. 외조부께서 세상을 떠나신지 대략 33년이 된 것이다. 뜰에는 풀들이 우거져 덩굴이 엉키고 잡목들이 무성하고, 담은 무너지고 집은 곧 내려앉으려 했으며, 지붕은 금이 가고 벽은 허무러져 있었다. 시를 쓴 현판은 반도 남지 않았으며, 비가 새어 들보와 서까래를 더럽혔으므로 더러 썩기도 하고, 창문과 지게문도 썩어 문드러져있었다. 어머님께서는 이것 때문에 통곡하며 우셨다.
나는 종들을 재촉하여 더러워진 것은 쓸어 내고 덩굴은 걷어 내어 깨끗이 청소하고 거처를 마련하였다 아아, 선조께서는 이처럼 터를 닦고 노부모를 모시는 곳을 마련하기에 부지런히 하셨는데, 후손들은 그세가 약하여 이 몇 칸의 집도 보호하지 못하고 무너지게 하였으니 그 죄가 실로 크다. 나는 비록 불민하나 마침 노모를 모시고 이 당(堂)을 이어 지키게 되었으니, 그 애일(愛日)의 생각이 어찌 선조에서 끊어지게 하여서야 되겠는가. 오로지 마음을 다하고 힘을 쏟아, 노력하며 정성스레 보전함으로써 어머님의 마음을 편안케 하고 뜻을 받들며, 선조의 터전을 개수(改修)하여 노닐며 편안히 지내다가 일생을 마친다면, 그나마 외조부를 구원(九原)에서 모시게 될 것이 아니겠는가? 드디어 기록하여 뒷사람들에게 보이고자 한다."
라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균은 10세를 전후하여 한성으로 올라가 어머니를 모시고 학문에 매진하다가 임진왜란을 피하여 사천 외가에 머물며 후일을 도모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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