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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초희(楚姬) - '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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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용을 모티브로 한 ‘불멸의 사랑’을 연재하는 동안 줄곧 난설헌 허초희(蘭雪軒 許楚姬, 1563~1589)를 생각했다. 언젠가는 새로운 각도에서 그녀의 일대기를 알기 쉽게 분석, 재정립해 보리라는 것이었다. 더구나 허난설헌은 강릉이 낳은 당대의 여류시인며, 우리 한민족 최초로 명나라에서 시집(詩集)을 편찬한 한류 시인이 아니던가.
시인이자 작가, 서예가 화가 등 다재다능함으로 짧은 생이지만 한국(조선)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그녀의 삶은 여성으로서의 섬세함과 독특한 필치와 애상적 시풍으로 그녀만의 특유한 문학세계를 이루어냈다.
신사임당 이후, 문향(文鄕)으로서의 명맥이 끊어질 위기에 처한 강릉은 당대의 석학이자 문장가인 허엽(許曄) 일가로 인해 다시 문향의 반열을 이어갔으며, 이후 후세들이 그 문학적 기운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 독자들이 알고 있다시피 그녀의 동생은 홍길동전을 쓴 허균(許筠)이다. 천재성은 물론 명문장가로서의 핏줄이 그들 집안에 배어있는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 허엽의 본관은 양천(陽川)으로 지금의 서울특별시 강서구, 양천구 일대를 관향(貫鄕/시조가 태어난 곳)으로 한다. 쉽게 말해 허엽은 서울 강남의 토박이였던 셈이다.
허엽은 정처와 후처 사이에 모두 3남 3녀를 두었다. 정처 청주한씨(淸州韓氏)와의 사이에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 허성(許筬)은 이조판서를 지냈다. 그는 한씨가 허성과 두 딸을 낳고 사별을 하자 재취(再娶)를 하였는데 그 부인이 강릉 김씨(江陵金氏)다. 선조(宣祖)시대 예조판서를 지낸 김광철(金光轍)의 딸로 김광철(金光轍)은 신라 명주군왕(溟州郡王) 김주원(金周元)의 후손이다. 이런 인연으로 허엽은 재취한 처가가 있던 강원도 강릉에서 봉(許篈), 초희(許楚姬), 균(許筠) 3남매를 낳게 된다.
허균은 초희의 바로 밑에 동생이자 이 집안의 막내다. 난설헌의 동복 (同腹) 큰오빠인 허봉 역시 조정의 명신으로 명문가였으며, 성리학과 외교에 이름을 널리 알렸다. 하지만 허봉은 동향 출신 율곡 이이와의 정치적 악연으로 인해 유배와 방랑생활을 하다가 38세의 나이로 객사를 하게 되는데 이 상황은 추후 별도로 다루기로 한다. 아무튼 허엽을 포함하여 허성, 허봉, 허난설헌, 허균은 당시 오문장가(五文章家)로 불렸다. 동의보감으로 유명한 어의 허준(許浚)이 그의 먼 친족으로 11촌 아저씨뻘이었으니 명문가라고 부른들 조금의 어색함이 없을 것이다.
초희는 막내 허균보다 다섯 살 위로 허옥혜(許玉惠)라는 이름이 있었으나 여자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조선시대의 관례에 따라주로 그녀의 호인 난설헌(蘭雪軒), 난설재(蘭雪齋)로 불렸다. 자는 경번(景樊)으로 남존여비의 시대 상황에도 불구하고 여식(女息)에게 이처럼 여러 개의 자(字)와 호(號)를 붙여주었거나 자발적 작명을 허용한 사례를 볼 때 초희의 아버지 허엽은 매우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인사였음을 알 수 있다. 어느 시대나 그렇듯 지식인들의 저항적인 면이 삶의 곳곳에 묻어나는데 이 저항정신은 시간이 지난 후 막내 허균에 의해 소설 홍길동전으로 표출된다.
그녀는 후실의 여식으로 태어나 안타깝게도 스물일곱의 나이로 불꽃같이 짧은 생을 마감했다. 일부 학자들은 그녀는 동생 허균과 같이 시를 통해 부조리한 시대와 사회에 저항했다고 평가하기도 했지만 과연 그랬을까?
삶을 마감하면서 함께 불태워지기를 원했지만 용케도 남겨진 213수의 시와 간신히 몇 점 남은 서화를 통해 그녀의 예술적 삶과 동시대 강릉의 인물과 풍습 등을 테마 형태로 재조명해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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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김석연님의 댓글
김석연 작성일450여년전 난설헌을 만나게 되어 기대가 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