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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詩이야기(123) .. 삼학사 오달제, 아내에게 보낸 편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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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世 讓 작성일 2016-07-19 19:27 댓글 0건 조회 1,05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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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라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여 청(淸)나라에 패한 병자호란(丙子胡亂)의 결과
     임금은 삼전도(三田渡)벌판에서 청나라의 장수앞에 무릅을 꿇고 용서를 빈다.
     이들의 요구는  청나라와의 평화를 거부한 선비들을 체포해 넘기라는 것이고
     이들을 압송하면서 봉림대군(鳳林大君)도 함께 인질이 되어 淸(청)의 수도인
     심양(瀋陽)으로 호송되어 심문을 받고 절조를 지켜 셋은 처형된다.

     이들, 홍익한(洪翼漢 : 1585~1637), 윤집(尹集 : 1606~1637), 오달제(吳達濟 :
     1609~1637)은 후에 삼학사(三學士)로 모두 시호가 내려지고 영의정에 추증
     되었다. 청나라 瀋陽에서 문초를 받을때 당당한 논리와 충절에 청의 태종도
     감탄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 오달제(吳達濟)가 심양에서 아내에게 남긴 칠언절을 소개한다.    
            瀋陽寄內南氏(심양기내남씨 - 심양에서 아내 남씨에게 보낸다.]

        地闊書難寄 [지활서난기]  땅이 넓으니 편지 부치기도 어렵고
        山長夢亦遲 [산장몽역지]  산이 기니 꿈조차 또한 더디니라.
        吾生未可卜 [오생미가복]  나의 삶은 점칠 수 없으니
        須護腹中兒 [수호복중아]  모름지기 뱃속의 아이나 보호하시요.
     당시 吳達濟의 나이는 29세였고 임신을 알고 잡혀가서 얼마후 처형되었으니
     출생을 몰랐을 것이다. 기록에 보면 그 아이는 딸이어서 양자로 대를 이었다.
     지금 이런 충절을 바라는 것은 무리다. 다만 국가수호를 위한 최소한의 인내
     정도는 감수 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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