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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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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규전 작성일 2017-10-27 11:35 댓글 0건 조회 64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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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택



   일전에 모 인사와 술자리를 같이 할 기회가 있었다
. 그날 오전에 고사를 지냈는데 거기에 팥 시루떡이 올라왔다. 그날 저녁 고사를 원만히 치룬 기념으로 조촐한 술자리가 마련되었다. 고사 이야기를 안주 삼아 술이 몇 순배 도는 과정에서 우리의 전통문화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 중에서 뜻밖에 안택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예전에는 집안마다 엄청나게 귀한 행사였는데 서양문물이 물밀 듯 들어오면서 거의 자취를 감춘 연례행사 중 하나가 아니었던가 싶다.

 

   안택은 집안을 편안하게 한다는 개념의 용어이다. 지금처럼 과학문명이 덜 발달하였던 시절에 집안이던 집밖이던 안녕은 각종신이 지켜준다는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다. 신을 노하게 한다거나 소홀히 다루면 액이 낀다는 생각으로 모든 생활 자체가 신과 연결되어 있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신 중에 가장 많이 들었던 신이 삼신할미가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신과 과학은 상호 배치되는 개념을 가진 것 같다. 신이 득세를 하면 과학이 죽어 버리고 과학이 살아나면 신이 죽는 식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삼신할미는 그 집안에 아이를 점지해 주는 신으로서 모든 집안에서 엄청 소중하게 다루었던 신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삼신할미를 잘 모시지 않았을 경우 그 집안에 자손에 문제가 발생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당시에는 당연히 신이 자식을 점지해 준다고 믿었으며 그 믿음에 대한 액션으로 삼신할미를 정중히 모셨던 것이다.

 

   조상신은 보통 제사를 통하여 모셔왔다. 아무리 가난해도 제사 때에는 이밥(쌀밥)에 어물과 과일을 준비해서 제사상을 바워왔다. “가난한집 제사 돌아오듯 한다.”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로 제사에 쏟는 정성도 그렇거니와 비용도 상대적으로 만만찮았던 것으로 인식된다. 특히 시골에서 없는 살림에 제사상을 한번 바우자면 기둥뿌리가 흔들거리는 것은 다반사였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에는 사돈에 팔촌까지 제사를 보러 갔던 풍습이 있었다. 그야말로 집안의 잔치나 마찬가지의 현상이 제사 때 마다 벌어졌었다고 본다. 그 제사를 바우는 종손 며느리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상상만 해도 끔찍하기 그지없다. 필자의 어머니도 지손의 종손으로서 역할을 하느라 등뼈가 굽어있는 모습을 보면서 지금도 안쓰러움을 떨칠 수 없다.

 

   안택은 이런 모든 귀신을 통틀어 통제하는 그야말로 많은 신들의 축제의 장이었을는지도 모른다. 신에는 그 집안을 이롭게 하는 신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신들도 상당수가 공존한다고 믿었었다. 가족이 아프거나 일이 제대로 안되거나 자식 농사가 뜻대로 안 되는 것은 잡신들의 훼방과 함께 노여움을 샀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해서 안택을 통하여 잡귀신을 쫓아내고 이로운 귀신을 모시는 행사를 벌렸다고 보면 될 것이다.

 

   안택에서 빠질 수 없는 음식이 팥 시루떡이었다. 팥은 붉은 색으로 잡귀를 쫓아내는데 특효가 있다고 생각하여 이 음식을 제단에 차렸다고 본다. 지금처럼 떡 방앗간이 있어서 쌀가루를 내고 거기서 떡을 맞추면 된다고 하지만 예전에는 모든 과정이 집에서 이루어졌었다. 안택의 날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날 받이를 해야 한다. 지역에 날 받이를 볼 정도의 식견이 있는 집에 가서 안택일을 받아왔어야 했었다. 필자의 아버지도 안택 날 정도는 볼 줄 알아서 필자가 어렸을 적 동네 사람들이 날 받으러 우리 집으로 들락날락 했던 기억이 가물가물 피어오른다. 다음으로 음식을 준비해야 하는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팥 시루떡을 만드는 것이다.

 

  신에게 바칠 모든 음식은 정갈해야 한다. 실제 추수가 끝난 다음 제사나 안택에 쓰일 재료는 특별하게 관리를 하였던 기억도 난다. 도정은 절구나 동네 디딜방아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쌀을 불려 소쿠리에 건진 후 아낙네들이 머리에 이고 방앗간으로 간다. 혹 아낙네의 남편이 인간성이 좋다면 지게로 져서 디딜방앗간까지 갔다 줬을 수도 있을 것이다. 방아를 찧는 작업도 만만치 않다. 쉴 새 없이 방아다리를 밟아야 되고, 한쪽에서는 채질에다 방아가 잘 찧어 지도록 방확에 손을 집어넣어 뒤집어 주어야 한다. 잘 못 뒤집다가 방꽁이에 손이라도 찌이면 사달이 나게 돼 있었다.

 

   정성들여 만든 쌀가루와 미리 삶아서 살짝 으깨어놓은 팥을 켜켜이 시루에다 쌓은 다음 찌게 된다. 혹 솥과 시루 사이에 김이 빠질 것을 염려하여 밀가루를 반죽하여 그 사이를 메꾸어 주었던 기억도 난다. 이 글을 쓰면서도 그 당시를 회상하면 지긋이 웃음이 나온다. 지금 생각하여 보면 얼마나 낭만적인 이야기인가? 하지만 당시에는 가족과 집안의 안위를 위하는 준엄한 행사인 고로 낭만이고 뭣이고 찾는 다는 것은 배부른 소리였을 것이다. 아니 없는 살림에 이런 행사를 치른 다는 것 자체가 고역 이였으리라 보나 가족의 안위를 위해 어디 가서 하소연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안택을 통하여 인간이 집 안팎에 귀신을 관리한다는 것 자체가 재미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 지금도 예전처럼 과학이나 문명이 정체되어 있다면 우리는 매년 안택에 사활을 걸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안택이 없는 세상이 멋있는 세상인지 아니면 안택이 있는 세상이 제대로 된 세상인지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본다. 안택 시절에 태어나 안택이 추억으로 되어 버린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된다. 왜냐하면 두 가지 모두 경험을 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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