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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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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규전 작성일 2018-04-15 19:08 댓글 0건 조회 86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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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이섬

 

   좀 남새스러운 이야기지만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남이섬에 가게 되었다. 등잔밑이 어둡다는 표현과 함께 주변머리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아닐까 싶다. 별로 어렵지도 않은 일인데도 불구하고 남들이 다 하는 경험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뭔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는 것으로 인식되리라 본다. 어찌하였던 기대 반, 설레임 반으로 출발한 남이섬 탐방은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남이섬을 가게 된 목적은 문화탐방이었다. 문화의 영역이 워낙 넓기에 단적으로 뭐라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남이섬만이 가지는 역사와 환경, 그리고 관광자원으로서의 역할 등을 체험하러 갔다고 하면 얼추 짐작은 가리라 본다. 사람의 욕심은 한도 끝도 없는지라 조그만 일에도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임하는 경우가 많은지라 그 결과에 대한 실망도 더 큰 경우가 많이 있으리라 본다. 물론 기대없이 어떤 일을 추진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는 것도 모르는 바는 아닐 것이다.

 

   홍천에서 출발한 남이섬 문화체험단은 춘천까지 고속도로를 달린 후 자동차전용도로를 통하여 가평까지 가게 된다. 창밖에는 벚꽃, 목련꽃과 진달래가 만발하는 그야말로 봄의 향연이 제대로 펼쳐지고 있었다. 확실히 맑지도 흐리지도 않은 그야말로 적당히 혼합되어 탐방을 하는 데는 그지없이 좋은 환경이 이어진다. 온도는 약간 서늘한 정도로 문화 산책을 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정도이다. 한 시간 정도 달리다 보니 가평역이 나오고 이내 목적지인 남이섬의 팻말이 보이기 시작한다.

 

   가평역을 지나면서 도로변에는 수많은 식당과 숙박시설이 눈에 띈다. 유명한 관광지라는 것을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주변에 관광용 건물들이 보인다. 강 주변임으로 강 언덕을 따라서 만들어진 각종 건축물들이 자연과 어우러져 관광지의 맛을 더 내는 듯 하다. 여기서 가장 특징적인 장면은 역시 닭갈비가 아닐까 싶었다. 한 집 걸러 한 군데 정도로 죄다 닭갈비집으로 이루어진 것 같았다. 아무리 닭갈비 고장이라 하여도 이렇게 닭갈비집이 많으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음식의 문화 중 닭갈비 쪽으로 체험을 하고 싶다면 춘천보다 남이섬 입구 쪽으로 오는 것이 더 나으리라는 생각이 들어간다.

 

   평일이라 길이 막히거나 교통체증이 생기지는 않았다. 목적지에 도착함과 동시에 압도하는 장면은 관광버스가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전국에 관광버스는 죄다 남이섬으로 몰려 온 듯 한 느낌이 들어간다. 보통 관광지는 승용차가 주로 많고 그 다음으로 버스가 주종을 이루는데 이곳은 거의가 다 관광버스이고 승용차는 그 사에 몇 대 보일 정도이다. 타 관광지보다 다른 패턴의 관광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한 번에 파악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이런 장면도 하나의 특이한 경우인 만큼 인상에 깊이 남을 수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서 일정에 관해서 인솔자로부터 간단히 듣고 이내 매표 및 입장으로 이어졌다. 매표소까지 가는 과정에서 수많은 관광객들이 버스에서 내려서 이동하고 있었다. 여기서 또 특이한 점은 우리가 외국에 나가서 가이드의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녔던 장면들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었다. 서울에 경복궁 같은 데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 여기서 펼쳐지고 있었다. 문제는 가이드의 깃발이 한 두 군데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 봐도 저길 봐도 가이더의 깃발만 보이는 것 같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남이섬은 동남아인들이 한국에 와서 한 번은 들렸다 가는 유명한 관광코스라는 것이다.

 

   세계적인 관광지는 그 관광지를 보여줄 수 있는 하드웨어가 출중한 경우가 대다수이나 남이섬의 하드웨어라는 것은 인공으로 만든 호수와 숲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해서 타 지역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수종이나 호수가 펼쳐지는 것도 아닌 어디 가도 볼 수 있는 것을 중심으로 꾸며놓은 정원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무수히 많은 외국 관광객들이 몰려온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반전이 하나 나타난다. 우리는 관광에 주안점을 하드웨어에 두고 살아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남이섬 관광은 그 하드웨어에 스토리가 덧씌워졌다는 것이다. 감성을 자극하는 스토리가 한국민은 물론 세계에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면서 그들이 직접 현장을 방문하고 있다는 것이다.

 

   십 수 년 전에 방영한 겨울 연가의 주 촬영무대가 여기라고 한다. 당시에 유명했던 배우가 여기에서 연기를 하면서 남이섬이 일약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많은 공감을 주었지만 당시 일본사회에도 우리 못지않게 격한 감동을 주었다고 한다. 드라마 한류 문화가 공전의 히트를 쳤던 것이다. 문제는 드라마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드라마 촬영 현장까지 명물화 되었다는 것이다. 그 드라마가 일본에 히트를 치고 이어 동남아를 휩쓸면서 그야말로 남이섬이 그들이 가보고 싶어 하는 로망으로 남게 된다. 실제로 남이섬 현장에 온 관광객들을 보면 히잡을 쓴 이슬람인 들이 꽤나 많이 보였다. 그만큼 다양한 나라에서 남이섬을 찾아온다는 방증이라 볼 수 있겠다.

 

   남이섬은 강원도와 경기도의 경계를 이루는 부분에 있는 섬으로서 소재지는 강원도에 속하면 남이섬을 갈 수 있는 출발지는 경기도라고 한다. 섬임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은 배와 다리가 있을 것인데 여기서는 배를 이용하여 가게끔 되어 있었다. 토목기술의 발달로 어지간한 섬은 죄다 다리를 놓았는데 여기에서는 아직까지 다리 공사를 하는 장면은 보이지 않는다. 섬으로의 신비함과 섬이 가지는 상징성을 살리자면 다리 공법은 별로 좋지 않은 접근법이라 본다. 육지의 호수에서 배를 타는 것 자체가 관광의 한 코스가 될 수 있을뿐더러 배를 타는 것 자체가 감동의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편리를 도모하기 위하여 다리를 놓았을 경우 섬이라는 이미지도 퇴색될뿐더러 섬이 난개발 되면서 신선한 이미지가 퇴색되리라 본다. 잘은 모르지만 남이섬에 다리가 놓일 일은 없지 않을까 하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육지에서 남이섬까지 가는 방법은 배와 집 라인의 두 가지가 있다. 배로 가는 것은 입장료에 그냥 포함되었음으로 더 이상의 비용은 지불하지 않지만 집 라인은 38,000원의 사용료를 내야한다. 거리가 940미터 정도 된다고 하는데 타 보지는 않았지만 순식간에 미끄러져 남이섬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배는 남이섬을 오가는데 최적으로 디자인 된 것으로 세대가 연이어 인원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오전 중에는 남이섬으로 들어가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오후는 반대로 육지로 나오는 관광객의 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운행시간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닌 손님이 많으면 빨리 움직이면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간다.

 

   섬으로 들어가는 배에는 적어도 몇 백 명 정도는 탑승할 것 같다. 일부 의자는 있었으나 1km도 채 안 되는 거리인 만큼 대부분의 사람들은 갑판에 나와서 주변의 경치를 즐기면서 가는 것 같았다. 실제로 협곡 사이에 볼록 튀어나온 섬인지라 주변의 경관은 자연 그대로가 우리의 시야로 들어온다. 때 마침 벚꽃이 필 무렵인 관계로 산천의 군데군데는 벚꽃으로 물들어 있었다. 일부 버드나무는 봄결을 먼저 받아서인지 제법 푸르스름하게 잎을 돋아내고 있었다. 배를 탑승 한 후 사진 몇 커트 찍었는가 싶었는데 이내 남이섬 선착장으로 들어섰다. 빨리 섬으로 가서 현장을 보고 싶어하는 관광객들이 서둘러 배에서 내리고 있었다. 한꺼번에 많은 인원을 실어 나르는 관계로 부두는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내리자마자 보이는 것은 숲과 함께 조형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바위에 새겨 놓은 흘림체의 글씨가 눈에 들어오나 그것을 굳이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은 들어가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 섬과 관련된 좋은 이야기를 써 놓았을 것이라는 지레짐작이 먼저 들어간다. 실제로 이 섬에 주인 격은 남이 장군 묘소인데 이를 먼저 보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싶었지만 일행과 같이 간지라 행동도 자의적으로 할 수 없었다. 짜여진 계획대로 움직일 수 밖에 없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난생 처음 간 지라 모든 것이 생소할 수 밖에 없었다. 아무리 식견이 출중하다 하여도 남의 영역에 들어가면 위축될 수 밖에 없다는 한계치를 그대로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짜여진 프로그램 대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먼저 섬 주위를 한 바퀴 도는 미니 전기버스를 이용한 섬 주위 탐방 코스가 있었다. 버스 한 대당 열 댓 명 정도 탈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버스 운전수가 가이드 역할까지 수행한다. 구간 구간을 지날 때 마다 그 지역에 특징을 일사천리로 설명을 해 준다. 탑승한 고객들은 그 기사가 이야기 해 준 곳으로 시선만 돌리고 귀만 열어주면 간단하게 목적달성을 할 수 있었다. 도로는 포장을 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땅을 살려서 만들어져 있었다. 가끔 가다가 파인 곳도 있고 울멍불멍한 곳도 있었다. 자연과 어우러진 버스 전용도로를 보면서 과거 포장이 제대로 되지 않았던 시골길이 문득 오버렙되었다. 이제는 어지간한 시골길은 다 포장이 되었고 농로도 포장이 된 세상을 살고 있는 관계로 흙 길을 간다는 것 자체에서 새로운 맛을 느끼게 된다.

 

   한 20여분 정도 걸려서 섬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내리자 마자 이어서 소형 협궤 기차 탑승 순서가 기다리고 있었다. 먼 거리는 아니지만 이번에는 남이섬 중앙을 꿰뚫는 코스로 기차길이 나 있고 그 곳으로 가게 되었다. 제주도에도 이와 비슷한 투어가 있었던 기억이 나는데 이 코스는 그렇게 길지는 않았으나 그런대로 운치가 있었다. 물론 제주도와는 환경 자체가 다르기에 비교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다. 여기서도 기관사가 요소 요소를 지날 때 마다 안내 멘트를 날려 보내 주었다. 버스와 기차 탑승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3천 원씩의 티켓비를 지불해야 했다. 걸어서 다니는 것이 남이섬 탐방에 백미임을 알았지만 이런 운송용 도구를 이용하여 다니는 것도 색다른 경험으로 와 닿는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이런 저런 체험을 하는 과정에서 점심시간이 되었다. 남이섬 남쪽 부근에 큰 식당이 하나 있는데 이름하여 남문식당이라 하였다. 메뉴가 썩 다양하지는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선호할 수 있는 식단이 마련된 것 같았다. 특히 동남아 여행객을 위해서였는지는 모르지만 불고기 백반이 주 메뉴 같았다. 그리고 가평에 유명한 막걸리를 소개하기 위하여 파전도 유명세를 타는 것 같았다. 식당은 테이크아웃에도 신경을 많이 써서 디자인 되었다. 온화한 날씨에는 실내보다 실외가 훨씬 더 색다른 맛을 나타낼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이용을 하는 터에 미리 야외에서 식사를 하는 것은 접어야만 했다. 외국 사람들도 이곳에서 만 맛 볼 수 있는 파전을 안주 삼아 가평 막걸리를 기울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오후에는 프리 탐방으로 이어졌다. 크게 넓은 곳이 아닌지라 구석구석까지 가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이곳의 특징은 강 상류에서 떠내려 온 토사가 모여서 된 섬인지라 주로 모래로 이루어진 충적토라 하였다. 그런 관계로 개발되기 전에는 원주민들이 주로 땅콩을 심어 먹던 곳이라 한다. 그곳을 개발하여 지금의 이 모습으로 보이게 하였다고 한다. 당시에 이렇게 고안한 사람은 지금 세계적인 명물이 될 것이라 예견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한 치의 앞은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 생각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코 밑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세상에서 이미 4~5십년 전에 이런 방식을 고안하고 행동에 옮겼다는 것은 가히 칭송을 할 만 한 일이라 본다. 물론 그 이면에는 여러 가지 말 못할 애환이나 문제점이 있었으리라 보지만 현 시점에서 보았을 때 선구자적인 역할을 한 것 만큼은 부인치 못하리라 본다.

 

   이 섬에 가장 큰 특징은 섬에 모양과 잘 어울릴 수 있도록 나무 종류별로 열식으로 식재를 하였다는 것이다. 중심부의 축의 역할은 이 지방에 명물인 잣나무를 세 줄로 섬 시작점부터 끝 부분까지 식재를 하였다. 잣대와 줄을 대고 심은지라 오와 열이 짝짝 맞을 정도로 일사분란하다. 군 생활을 한 사람들이 보면 역시나 하고 감탄을 할 정도일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보아도 시원스럽고 절도 있는 모습을 연상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축을 중심으로 갈비뼈처럼 옆으로는 다양한 나무를 열식으로 심어 놓았다. 겨울연가에서 많이 보여주었던 은행나무와 메타세콰이어가 돋보인다. 그 외 벚나무와 계수나무, 단풍나무, 자작나무가 주류를 이루고 있고 그 사이사이에 많은 종류의 수종들이 자신들만이 가지는 멋을 나타내고 있다.

 

   그 쪽에 있는 시설물 중에서 음악박물관이 있었다. 과거와 현재를 풍미했던 가수들의 사진과 그들의 싸인 모습을 출력해 놓은 면이 보인다. 그리고 과거 레코드판을 전시해 놓은 코너도 있다. 전축이 음악을 표현해 주는 시절에 엘피판은 그야말로 음악을 저장하는 매체로서 각광을 받았었다. 그 이후 씨디가 나오고 유에스비가 출연하면서 엘피판은 역사의 뒤안길로 가게 된다. 그런데 그 엘피판이 쓰레기처럼 버려지던 시절에 그것을 주서 모아 놓았던 사람들은 그 판이 이제 재산가치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지하로 내려가니 현악기와 목관악기를 주로 하는 악기 박물관이 있다.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그리고 동남아 원산의 악기들이 전시되어 있었으면 중앙아메리카에서 온 악기도 간간히 보이는 것 같았다. 1층의 전망 좋은 곳은 악기를 중심으로 한 카페가 성업 중이었다.

 

   남이섬의 백미는 남이장군의 묘소일 것이다. 원래 남이장군의 묘소는 돌과 흙으로 엉성하게 만들어져 있던 것을 이 섬의 개발자가 지금의 모습으로 재단장을 하고 비석도 그럴싸하게 세워놓았다고 한다. 비문은 유신시절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내용에서도 그 시대상을 그대로 반영한 듯 한 모습으로 비쳐진다. 예나 지금이나 남 잘 되는 모습을 두 눈 뜨고 못 보는 사대부와 기득권층의 부조리한 모습을 그대로 보는 듯 하였다. 뛰어난 인간은 언젠가는 정권에 누를 끼칠 수 있다고 해서인지는 모르지만 뛰어난 사람이 나오면 어떤 명분을 세워서라도 망가뜨려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 역사의 자화상을 보는 듯 하여 씁쓸하기 까지 하다. 남이 장군이 비명에 횡사를 하지 않고 그 시대를 제대로 풍미했다면 우리 역사를 새롭게 만들었을는지도 모른다. 남이 장군 묘소를 보면서 그 당시에 정권이 얼마나 이 사람을 핍박하였으면 죽은 사람까지 귀양살이 수준으로 처리하였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간다. 우리의 역사에서 선각자이면서 쓸만 한 사람은 거의 귀양살이를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니 아예 남이 장군처럼 죽인 후 시체를 귀양 보내는 등의 비신사적이면서 비 인륜적인 정치를 해 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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