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깍 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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깍 꿍
아이를 키울 때 깍꿍이 없으면 어쩔 뻔 했나 할 정도로 아이와 어른을 연결해 주는 중요한 교감 언어였으나 언제부터인가 그런 단어가 장롱 속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아이들이 많았던 시절에 어떤 아이에게 적용을 시켜도 빵긋 웃었던 마법의 단어였는데 그것이 고루하게 변하고 만 현실이 한스럽기도 하다.
깍꿍이 대중적으로 쓰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그 단어 자체가 촌스러워서 그런 것은 아니라 본다.
깍꿍을 외쳐줄 어른은 무진장 많은데 그것을 수용해줄 아이는 가물에 콩 나듯 잘 보이지 않는데서 출발한 것 같다.
예전 같으면 손주를 붙잡고 늘상 깍꿍을 외쳐야 할 상황인데 그런 단어에 녹이 슬어버렸으니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난감할 뿐이다.
깍꿍의 쓰임새는 특별한 면이 있다.
모든 언어가 쌍방형이지만 유독 이 단어만큼은 일방형이라는 것이다.
오로지 어른이 철없는 아이들에게 해야지만 제 맛이 난다는 것이다.
아이도 깍꿍을 듣는 순간 일그러졌던 표정이 밝게 빛나면서 환한 반응으로 되돌아 온다는 것이다.
깍궁이 가지는 언어적인 마력이 그렇게 큰 것인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성을 느끼듯
이렇게 좋은 언어를 두루 사용하고자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깍궁’하고 외쳤다 하자.
아마 그 단어를 들은 연장자는 “이놈이 실성을 했나?”할 것임은 불 보듯 뻔한 일일 것이다.
같은 단어지만 누구에서 쓰면 빵긋 웃고 또 어떤 이에게 쓰면 이상한 놈으로 보이는 야누스적인 의미를 가진 단어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웃는 얼굴에 침 밷지 못한다 했다.
깍꿍을 쓰면 대부분의 한국산 아기들은 빵긋 웃는게 정상일 것이다.
다리 밑에 사는 거지도 아이 때문에 웃는다고, 웃음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은 상상을 초월한다고 하다.
일소일소 일노일노라고 한번 웃으면 한 번의 젊음이 다가오고 한번 노하면 늙음이 다가 온다는 이야기다.
이를 과학적으로 입증시켜 주는 것이 깍꿍을 받으면서 웃음을 잃지 않는 아이들은 어른에 비하여 앞날에 살 기간이 적어도 50~60년은 길어진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렇게 험악한 세상에 아무런 의미도 없이 실실 웃으면서 다닌다는 것은 자칫 나사가 빠진 인간으로 보일 수 도 있을 것이다.
세월이 갈수록 웃음의 기회보다 노할 기회가 많아짐은 웬 일일까?
억지로 웃기 위하여 개콘을 보는 것도 한계가 있는 것이 이세상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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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김석연2님의 댓글
김석연2 작성일
까꿍? 오랫만에 들어보는 반가운 소리네요.
그 반가운 말을 전해줄 대상이 없다는게 서글픈 일입니다.
특히나 남의 아이를 귀엽다고 머리조차 쓰다듬지 못할 세상이 되어
점점 삭막해 짐을 느낍니다.
살맛나는 세상 어디 없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