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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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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석연2 작성일 2018-05-15 12:43 댓글 1건 조회 66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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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의 언덕

 

우리가 살던 고향 옛집은 할아버지께서 손수 지으셨다.

지형에 따라 짓다보니 그런지 몰라도 북동방향이었다.

집앞으로 기다란 밭이 길이방향으로 있었고 동쪽편에도 밭이,

집 뒷쪽으로도 밭이 있었다.

고향집은 둔지중간에 있는 다른 집들과는 달리 둔지 아래쪽에 있었다.

 

 

할아버지께서 집을 지을 때 고민도 많이 하셨을 듯 싶다.

평평한 땅이 아니라 약간 경사진 둔지에서 과연 어느 곳에 집을 지어야 할지.

둔지 아래쪽으로 너무 내려가면 집터가 너무 습해서 안되고

둔지 중간으로 올라가면 습한 기운이 없어 좋기는 하나

물이 걱정이었을 것이다.

둔지 중간에서 물길만 터지면 그 보다 더 좋은 집터가 없는데.

 

 

할아버지는 둔지 맨 아래쪽은 피하고 둔지 중하쪽에 집을 지으셨다.

할아버지의 예견은 맞았다.

고향 옛 땅의 둔지 맨 아래쪽은 원래 밭이었는데 하도 물이 차

논으로 전환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기막힌 선택을 하신 할아버지는 선견지명이 있었다.

무려 70년을 물 걱정 없이, 습한 기운 없이 살아왔으니 말이다.

 

 

고향집 주변으론 샘물이 세군데 있었다

집 동쪽 아래쪽엔 큰 샘물이 있었고(우린 아래짝샘물이라 불렀고 식수로 썼다)

(뒤뜰)에도 샘물이 있어서 그건 설거지 또는 세수용으로 사용했다.

집 서쪽편엔 야트막한 산이 있었고

수령이 100년은 됨직한 소나무가 빽빽이 서 있었다.

그 아래, 동네 길을 사이에 두고 샘물이 흘러 나왔는데

그 샘물은 먹지는 못하고 낫을 갈거나 논일 하다가 발을 씻는 샘물로 사용했다.


상현네 집은 우리집에서 산등성이로 가파른 길을 한참 힘들게 올라가야 있었다.

나무지게를 지고 올라가면 종아리가 땡겨서 힘들어 하던 길이다.

요즘 아파트 층수로 본다면 우리집은 1층이고 상현네집은 5층 높이에 있었다.

 

 

우리집과 상현네집의 현격한 높이 차이는 한가지 일례로 쉽게 이해가 간다.

어느날 상현이 아버지가 바소구리를 지고(싸리 소쿠리를 지게에 얹어)

상현네 집에서 언덕길을 내려오고 있었고

상현네 소는 언덕위의 상현네 외양간에서 나와 서성이고 있었는데

아래쪽 우리집에서 상현네집 위쪽을 바라본 상황은

상현이 아버지가 소를 짊어지고 내려오는 것으로 보였으니

그 경사도를 쉽게 짐작할수 있다.

 

 

상현네는 샘물이 나오지 않았다.

양지방향으로 잘 꾸면진 상현네 집은 다 좋은데 물이 나지 않았다.

물의 혜택을 받은 것은 상수도 시설이 들어서고 나서였다.

내가 기억 하기론 50년정도는 물 때문에 혹독한 고생을 한것같다.

상현이 엄마도 젊었을 때부터 물을 이어 날랐을 거고

아이들이 태어나 성장하면서 그일은 자연스레 딸아이들로 이어졌을 것이다.

대물림 고생이 바로 이런거구나 싶다,지금 생각해 보니....

 

 

달포전에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누구 아니냐고.

어디 살던 누구 아니냐는 상대편의 목소리에 어벙벙하며 그렇다고 했다

 

오빠야! 상숙이야.....상현이 오빠 동생...”

“.......... 상숙이?”

갑자기 눈앞이 흐려지며 50여년전의 일상으로 몰입되어 갔다.

나하고 같은반에서 공부를 하던 상현이는 공부도 잘해서

강릉으로 진학할거라고 내심 작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집안사정은 여의치 않았던가보다.

올망졸망한 동생들이 여섯이나 되어 부담으로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학교를 졸업하고 일찍 사회에 발을 들여 놓은 상현이는

동네 형들을 따라 탄광엘 다니기 시작했다.

아직 미성년이라 입항은 하지 못하고 바깥일을 하며 일을 배워나갔다.

1년만 고생하기로 했다. 돈을 모아 진학할거라고 하면서..

영어가 문제라고 하면서 어디를 가던 단어장을 갖고 다녔다.

그러나 그 일년은 이태 삼년으로 늘어났고

단어장은 너덜거려 글자도 분간못할 즈음 한바탕 눈물과 함께 버려지고 말았다..

 

 

그렇게 고생하던 상현이는 40중반에 급성간암으로 저세상으로 떠났다.

돈을 많이 벌었으니 고향에 땅을 사서 집도 새로 짓고 관정을 파서

평생 물걱정 없도록 만들어 주겠다고 여동생들과 약속했던 상현이는

지울수 없는 한을 남기고 떠났다.

산길따라 물동이를 이고가던 두 아이들이 떠 올랐다.

아이들이라고 해도 나하고는 네살, 여섯살 차이밖엔 나지 않지만.

 

 

물이 나지 않는다는 건 무엇일지?

누군가는 일곱식구의 식수를 충당해야했고 허드렛물도 넉넉히 받아 놔야했고

애지중지하는 암소 한마리 여물도 끓여야 하는데 그 많은 물을 어떻게 감당했을까?

 

 

상현이 여동생 둘이 그 힘든 일을 맡아서 했다,

내가 고향을 떠나 다른곳으로 이사 오기전까지.

두 아이들 결혼해 나갔을땐 그 밑의 여동생들이 그 일을 이어서 했겠지....

어느해 겨울엔 눈이 와도 너무 와서 허리까지 쌓였었다.

온세상이 눈밭이라 길을 찾기도 난감했다.

우린 겨우 변소가는 길만 내고 방안에 들어 앉아 고구마를 구워 먹고 있었다.

 

 

그 아이들,

상현이 동생 둘은 그 일이 당연한 듯 삽을 들고 와서 샘길 눈을 치우고 있었다.

상현네 집에서 경사진 산길을 지나 우리집 바깥 담을 돌아 아래짝 샘물까지

그 긴 거리를 둘이 힘에 부쳐가며 눈을 치우고 있었다.

당장 물이 급했으니.....

 

 

엄밀히 말하면 집앞으로 난 길은 우리밭이었고

눈을 치워도 우리가 치워야 했는데 강 건너 불보듯 멀뚱멀뚱 보고만 있었다.

(마치 아쉬운 사람이 하라는 듯이)

    
전화 저쪽편에선 오랜만에 만난 오빠친구가 반가운지

그동안의 사연을 어젯일인양 살갑게도 전해 주는데

난 가슴 한쪽이 무겁게 억눌려 있었다.

 

 

눈이 펑펑 오던 날

집앞 담장밑으로 난 길

허리까지 쌓인 눈

정지칸에 부삽이라도 들고 나와 치우는 척이라도 했으면

오늘 이렇게 전화를 받고 가슴이 무겁지는 않았을텐데.....

 

 

50여년전의 일상이 친구 동생의 전화 한통으로 되살아 난다.

하늘에 있는 친구야 좋은세상에 다시 태어나라.

타지로 시집간 여동생들아 행복하게 잘 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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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포님의 댓글

에이포 작성일

코끝이 시큼해지고 가슴이 먹먹해 지는 글입니다.
'눈이 펑펑 내리던 날 담장밑으로 난 길'
우리 모두가 따라 걸었던 길
그 한스러우면서도 정겨웠던 길이 다시 되살아 난듯 합니다.
까마득히 잊혀졌던 그 길을 다시 걷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