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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교 인문계 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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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규전 작성일 2018-04-18 18:49 댓글 0건 조회 66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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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교 인문계 아리랑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같은 아리랑이지만 지역마다 불리어지는 아리랑 가락의 맛은 천양지차로 느껴진다. 어떤 아리랑은 흥에 겨워 어깨춤이 저절로 나는 반면 어떤 아리랑은 부르면 부를수록 가슴 속을 후벼 파는 듯 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도 있다.

 

   이렇듯 아리랑 만큼 우리 민족의 애환을 같이 한 음악의 장르도 많지 않으리라 본다. 일제강점기에 서양음악 위주로 음악교육이 이루어지다 보니 실제 우리 음악은 서양음악의 아류 정도로 전락이 된 것도 부인치 못하리라 본다. 실제로 우리의 전통 음악이 주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음악은 서양음악의 그늘에 가려 겨우 명맥을 유지할 정도에 그치고 있다. 그리고 체계적인 음악교육을 받은 학자들은 거의 다 서양음악으로 일관한지라 우리의 음악이 설 땅 자체를 원초적으로 확보하지 못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서양에서 들어온 다양한 음악의 장르를 유심히 살펴보면 우리에게도 다 있었던 것들이다. 서양에 성악이 있었으면 우리에게는 가곡이 있었다고 본다. 서양에 오페라가 있었으면 우리에게는 판소리가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 것은 다 구질구질하고 엽전 냄새가 나는 것으로 치부된 음악의 역사도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체계적인 교육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체계가 잘 잡힌 쪽의 학문을 들여다 쓰는 것은 어쩔 수 없다하여도 이제는 우리도 우리 것에 대한 가치를 스스로 높여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본다.

 

   아리랑을 이야기하다 보니 음악 교육 쪽으로 흘러버린 것 같다. 우리 민족의 DNA에는 싫던 좋던 아리랑이 각인이 되어 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음악에 음자도 몰라도 아리랑을 몇 번만 들려주면 누구나 흥얼거릴 수 있는 가락이 아리랑이 아닐까 싶다. 아리랑이 우리 민족의 애환과 함께 이어져 오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아리랑은 우리의 대소사와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숙명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몇 년 전인가 강릉의 남쪽 산 기슭에 자리잡은 구정에서 구정 아리랑 축제가 열렸던 기억이 난다. 필자의 집이 그쪽인 관계로 주말에 가다보니 구정아리랑 축제가 열린다는 프랭카드를 본 적이 있었다. 당시에 구정 마을에 풀어야 할 난제가 있었는데 이것을 좀 더 부드럽게 풀 수 있는 방법을 찾던 중에 아리랑 축제 식으로 승화를 시켰던 기억이 떠오른다. 얽히고 설킨 일들을 부드럽고 아름답게 풀 수 있는 방식으로 음악을 택했고 그 음악의 대상이 아리랑이었던 것이다.

 

   인간사에서 꼬인 실타래를 정서적으로 풀 수 있는 좋은 방법 중에 하나가 아리랑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무수히 다가오는 난제를 어떻게 잘 풀어 가느냐가 인생의 성패와 직결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법률이나 규칙에 의해서 명쾌하게 푸는 것도 좋겠지만 그러다 보면 서로가 얼굴을 붉히고 반목으로 갈 가능성도 많다는 것이다. 인간사회가 정으로 뭉치는 것이 아니라 기계적인 잣대로 선을 그어야 하는 세상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교는 192771일 옥천동에서 개교한 이래 90여년의 역사를 넘기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개교하여 해방을 맞고 이어 6.25사변을 겪으면서 많은 부침과 영욕의 학교 역사를 가지고 있는 유서 깊은 학문의 전당으로 이어져오고 있다. 이렇게 장구한 세월을 거치면서 농고에서 농공고로 다시 농고에서 또 농공고로 변했다가 이제 중앙고라는 이름으로 현재에 이르게 된다. 학교도 화부산 밑에 명륜당에서 시작하여 현 강릉여고 자리에 갔다가 다시 강남의 현 위치로 옮아 앉았다. 교문의 위치도 몇 차례 바뀌었고 예전에 고색창연하던 강당, 농기구실, 일본식 온실, 일본식 축사, 계사 등도 모두 없어진지 오래되었다. 제비리에 경영목장도 이제는 예술고등학교가 그 자리를 메우고 있다. 거기가 과거에 강릉농공고 농장이었다고 인식하는 사람들도 이제는 많지 않으리라 본다. 과거에 다녔던 동문들은 추억과 애환이 한껏 깃들여진 많은 시설물들과 공간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우리의 역사와 함께 했던 손때 묻은 시설과 설비 그리고 공간들은 알게 모르게 우리의 곁을 떠나갔다. 우리의 모교를 기준으로 보았을 때 살점이 떨어지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고통을 겪으면서 그런 일들이 벌어졌을 것이다. 우리 동문들은 그런 과정에 대해서 피상적으로만 알았지 직접 관여할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았으리라 본다. 설사 안다 한들 재야인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에서 달리 손쓸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세월이 가고 사회가 변하면서 우리의 모교는 그 격량에 더 격하게 부딪힌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 과정에서 우리만이 겪어야 하는 내환과 외환은 우리 스스로가 삭힐 것은 삭히고 쌓아 놓을 것은 쌓아 놓았다고 본다.

 

   우리 동문들의 가슴속에는 알게 모르게 한이 쌓이는 식으로 모교가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한이 많은 만큼 많은 동문들의 가슴에는 많은 멍울이 맺혀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한이 모교에 변화과정에서 응어리 진 부분도 있을 것이고 모교를 나와서 사회생활을 하면서 모교에서 제대로 배우지 못한 부분에 대한 한도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더 많은 한이 분출되는 것이다. 어디 가서 하소연 할 때도 마땅치 않은 상황까지 내 몰리고 있는 형국이다.

 

   쌓이고 쌓인 한의 한 줄기가 모교의 인문계화가 아닐까 생각된다. 우리 학교를 나온 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십 수 년 동안 인문계화에 전념을 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사이를 풍미했던 많은 동문회장님들은 취임식 때 단골매뉴로 모교의 인문계를 성취하겠노라고 공약을 걸었던 역사도 있었다. 지금와 보면 하나도 실천된 것은 없고 허무한 시간만 날린 모양새가 된 것이다. 그렇다고 인문계에 대한 희망이라도 보일 것 같으면 위안이라도 삼겠지만 실낱같은 빛줄기도 보이지 않는데서 안타까움은 더 커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모교의 인문계화는 이제 아리랑 수준으로 승화가 되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많은 동문들 가슴속에 응어리로 남는 모양새이다. 아무리 외쳐도 들어주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고 시간은 점점 흘러 추진 역동성은 점차 소진되는 모양새이다. 가장 전통적인 우리나라 가락인 아리랑이 우리 모교 인문계에서 녹아 내려도 어느 정도 소화할 수 있는 단계까지 오지 않았나 싶을 정도이다. 우리 민족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가 한을 쌓아두는데도 일가견이 있지만 이것을 푸는데도 일가견이 있는 민족이라는 것이다. 그 한풀이의 장르 중 하나가 아리랑이 아닐는지.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다하여도 아리랑 한 소절만 부르면 가슴이 뚫리는 듯 한 느낌을 받는 것이 아리랑의 마력이 아닐까 생각된다.

 

   현실의 벽은 높고 그 벽을 넘고 싶은 욕망이 클수록 성취욕도 생기겠지만 거기에 반해서 좌절과 한계를 느끼는 경우가 있으리라 본다. 우리 모교의 인문계화의 추진과정에서 현실의 장벽이 높다는 것은 이미 다 알고 있으리라 본다. 그렇다고 인문계화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법에도 없는 일이 왜 이리 힘들 것인가에 대해서 많은 노력과 고민을 해 왔다고 본다. 하지만 지금까지 백약의 처방을 다 써 보아도 현실화 되지 못한 것이 현실인 것이다. 한계를 넘어서 체념의 단계로 가면서 이제는 가슴에 한을 쌓아 두고 풀어야 할 단계까지 온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푸닥거리 차원에서 접근하기에는 격이 너무 낮은 것 같고 타령으로 풀어내기에는 너무 처량한 것도 부인치는 못하리라 본다. 한 술 더 떠 아리랑으로 승화시켜도 큰 무리가 없는 단계까지 오지 않았나 싶다. 우리 모교의 인문계화가 되는 날까지 인문계 아리랑을 통하여 정서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심금을 울려주는 접근법은 어떨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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