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동문 문화예술
애冬至
페이지 정보
본문
애冬至
인간은 자연에 한 조각에 불과하다고 본다.
생물학적으로 자연에 존재하는 동물 중 하나가 인간으로 진화를 하여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자연과는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존재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겨울은 인간이 생활하는데 매우 부적합한 계절이다.
날씨도 춥고 먹을 것도 없는 관계로 이때에 얼어 죽는 사람도 많이 있다고 본다.
통계상으로 보아도 겨울철에 죽는 사람이 1년 중에 가장 많이 발생하고 있다.
그만큼 겨울은 인간에게 치명적으로 험악한 계절인 셈이다.
오늘은 음력으로 동짓달 초열흘날이다.
冬至가 초순에 들어서면 애동지, 중순이면 중동지, 하순이면 노동지라 불렀다.
그걸 보면 절기가 음력과는 약간 어긋나 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
동지 이후부터 해가 점점 길어지긴 지지만 날씨는 앞으로 한 달 정도의
기간이 가장 춥게 된다.
동지는 겨울의 상징을 나타내는 절기이다.
실제적으로 밤의 길이가 가장 길고 상대적으로 낮의 길이는 가장 짧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햇볕 비치는 시간이 짧아지면서 지상의 온도가
떨어지는 구조로 되는 것이다.
거기다가 햇볕이 비치는 각도가 가장 큰 예각으로 변하면서 동일한 빛이
온다하여도 비치는 면이 넓어지면서 지표면의 온도가 더디 올라가는 구조로
변해버린다.
지금은 난방, 보온, 섬유산업 등이 발달하면서 어지간한 추위 정도는 감내할
수 있도록 변화와 발전을 가지고 왔다.
추우면 보온이 잘 되면서 난방기가 빵빵 돌아가는 건물로 들어가면 쾌적한
환경과 만날 수 있다.
섬유산업이 발달하면서 두툼하고 보온이 잘 되는 털옷, 냉기가 안으로 스며들지
않는다는 신소재 섬유도 발달하여 추위를 이기는데도 큰 무리가 없다고 본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일단 가옥들이 다 허접했다.
아무리 기와집에서 산다고 해도 벽면은 에를 얽어서 그 위에 진흙을 바른 다음
도배를 했을 뿐이다.
창문은 창호지를 발라 놓았을 뿐이다.
구들 천장에는 나무 장작 같은 것을 깔고 그 밑으로 흙을 발랐거나 그것도
아니면 그냥 얼럭 위에다 시멘트 종이 같은 것을 살짝 발라 놓았다.
그 위는 쥐새끼들의 놀이터나 마찬가지였다.
한 참 눈을 붙이고 잘라치면 쥐들이 천장 위에서 왕복달리기를 하는 듯 한 소리가 나곤 한다.
구들장에는 초저녁에 불을 피워서 아랫목은 절절 끓을지 모르지만 새벽녘엔 사발에
물이 꽁꽁 얼 정도이다.
지금처럼 카시미롱 이불이 있었던 시절도 아니었다.
옥양목에 솜을 넣어서 만든 이불을 온 가족이 한 데 덮고 잤다.
귀텡이에 잠자는 자는 자칫하다보면 맨싸대기에서 새벽을 맞아야 하는 불상사도
생긴다.
옷은 어떤가?
그 전 시대에는 주로 삼베가 주축을 이뤘다.
그 이후에 옥양목이라는 섬유가 나와서 그래도 추위를 좀 덜어 주었지만 그
또한 방한용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나온 것이 나이롱이다.
나이롱 옷은 그래도 바람막이가 잘 되는 편이었으나 그 옷을 입고 군불이라도
한 번 때고 나오면 여기저기에 빵구가 나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장갑은 구경하기조차 힘들었지만 집에서 뜨개질이라도 하는 사람이 있으면
하나 얻어 볼 정도였다.
양말도 한 두 개를 가지고 겨울을 났다.
지금처럼 재질이 좋지 않으면서 한 두 켈레를 가지고 신다보니 노상 빵구가
나서 꿰매 신기를 밥 먹듯 해야 했었다.
밥은 어떤가?
쌀밥은 귀한 부호의 집에서나 맛 볼 수 있는 음식이었다.
보리밥도 제대로 얻어먹지 못하고 감자나 강냉이를 삶아서 된장이나 소금에
꼭꼭 찍어 먹었다.
그런 음식이라도 배불리 먹었으면 소원이 없었겠지만 그것도 제대로 제공 안
되는 집안도 부지기수였다.
일상생활을 비참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먹는 것, 자는 것, 입는 것은 말 할 것도 없고, 일상생활에서도 곤궁스럽기
그지없었다.
지금처럼 수도꼭지를 오른쪽으로 틀면 뜨뜻한 물이 나오고 왼쪽으로 틀면
시원한 물이 나오는 시절이 아니었다.
상수도가 없던 시절이라 동네에 한 두 개 있는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길러와야 먹을 물을 구할 수 있었다.
이런 가운데 샤워나 목욕을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고 할 수 있는 시설물도
아예 없었다.
겨울철 내내 때를 내 자신의 피부에 보호막 정도로 인식하고 살아갈 수 밖에
없었다.
잘 씻지 못하고 잘 먹지 못하다 보니 손발을 오뉴월 가뭄에 논바닥 갈라지듯
쩍쩍 갈라지면서 그 안에서 피가 나와 굳어버리는 불상사까지 발생되었다.
그래도 시골에서 소라도 키우는 집에서는 소여물 끓일 때 거기서 나오는
뜨끈뜨끈한 물에 손을 불려 튼 손에 때를 밀곤 했다.
잘 못 먹고 잘 못 입고 추운데서 벌벌 떨면서 살다보니 자연스럽게 건강에도
적신호가 켜지게끔 돼 있었다.
특히 내성이 약한 어린아이들이나 노약자들은 겨울나기가 더더욱 힘들었다.
노약자들은 험악한 겨울을 견디지 못하고 저승으로 가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고 본다.
아이들은 겨우내내 감기를 달고 살았다.
지금처럼 감기약이 있는 것도 아니다보니 감기가 일상화되다 시피 했을 것이다.
어느 집 아니던 간에 겨울철만 되면 코에서 누런 코가 상시 흘러내렸던 적도 있었다.
지금처럼 티슈가 발달했던 시절도 아니었다보니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콧물은
자신의 옷소매가 담당해 주어야 했던 시절이다.
소매가 콧물에 쩔어 반들반들해져도 그 옷을 세탁할 수 없었다.
물을 길러다 먹는 처지에 묵은 빨래를 한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었기 때문
이었을 것이다.
빨래는 못하고 머리도 잘 못 감고 목욕은 더더욱 못 하던 시절에 신난 곤충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이었다.
이 이는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골고루 서식하는 사람과 가장 가까운 곤충이
되어 버린 것이다.
머리를 얼개나 참빗으로 빗어 보면 머릿니가 쏟아진다.
머리에서 둥지를 튼 이는 몸에 이와 달리 약간 까무잡잡하게 생겼다.
동지섣달 긴긴밤에 할 일이라곤 이 잡는 것 이외에는 마땅한 게 없었다.
이를 잡지 않으면 개루워서 일을 할 수 없는 관계로 밤이면 밤마다 이
잡기를 안 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된다.
내복을 벗어서 뒤집을 다음 꿰맨 말기 근처를 살살 뒤져보면 좀 과장된
표현으로 보리쌀 크기의 이가 발견된다.
그렇게 큰 이를 잡을 때엔 약간의 성취감과 희열 같은 것도 느꼈던 기억이 난다.
그걸 화롯불에 넣으면 구수한 냄새가 난다.
그것도 단백질이라고 고기 굽는 듯 한 냄새가 나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이의 알을 써개라고 했다.
이것 옷의 말기 부분에 붙어있으면서 떨어지지도 않는다.
할 수 없이 이빨로 꼭꼭 눌러서 터트리거나 등잔불에다가 잠깐씩 스쳐가게
만들면서 태워 버리는 방법을 택했다.
이때엔 써개 타는 냄새와 함께 써개가 타면서 톡톡톡 하면서 소리가 났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이를 다 잡고 난 옷을 입고 다음날 일상생활을 해 보면 훨씬 덜
가려웠던 기억도 어렴풋이 떠오른다.
동지 무렵에 간식은 고구마와 동치미가 주류를 이루었다.
혹시 강냉이 농사를 짓는 집에서는 광밥을 튀겨와서 간식으로 활용했던
경우도 있었다.
물론 명절 무렵이면 엿도 고아서 먹었고, 떡도 만들어 먹었지만 그것은
일회성에 그친 간식부류였다.
고구마는 얼띤 식품이다 보니 조금만 추워도 얼어서 먹지 못한다.
언 고구마는 소여물 끓이는데 이외는 만고에 써 먹을 수 없게끔 되어 있다.
해서, 고구마 저장고는 감자처럼 헛간에다 하는 것이 아니라 아랫목에다
만들어 놓았다.
지금처럼 밤고구마도 아니고 그냥 재래식의 물고구마였다.
구어서 먹으면 너무 많이 먹었던 관계로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생으로 깎아서 먹었다.
동치미는 많이 먹으면 물을 더 먹어야 함으로 배가 고프면 몇 조각 먹고 물
한 사발 들이키는 것으로 종을 쳤다.
사오십년 전에는 겨울철이 지금보다 훨씬 더 추웠다.
심적으로 추웠던 것이 아니라 실제로 지금보다 온도도 낮았고 눈도 훨씬 더
많이 왔었다.
생활환경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엄청나게 열악했다.
그렇게 고약한 환경에서도 희망의 끈을 엮어 갔던 것이 명절이었다고 본다.
동지는 우리 조상들이 상당히 중요시 했던 명절 중 하나였다고 인식된다.
팥죽제사까지 지냈던 가정도 있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조상신을 모시는 게 가장 우선시 되던 시절이었던지라 어떤 계기만
있으면 제사부터 먼저 치르는 게 하나의 관행이자 문화였던 것 같다.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는 떡부터 만들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동지에는 밥이나 떡을 위주로 음식을 만든 것이 아니라 좀 독특하게
팥죽으로 발달시켰다.
팥죽이 태동된 동기는 집안에 악귀를 내 쫒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팥죽과 악귀와는 무슨 관계가 있냐고 반문하는데 자색일 귀신을 내 쫒는데
좋은 색깔이었다는 설도 있다.
예전에는 길흉화복이 죄다 귀신의 농간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믿었다.
그래서 발달한 것이 굿이었지 않나 싶기도 하다.
동지가 되면 그간에 집안을 괴롭혔던 악귀도 내 쫒으면서 다음에 올 악귀가
범접을 하지 못하도록 단도리를 하기 위하여 팥죽을 쑤었다는 것이다.
팥죽도 죽임으로 먹는 량이 만만찮이 많았다.
특히 1년에 한 번 밖에 못 얻어먹을 음식이었던 만큼 선호도도 높았다고 본다.
특히 보리알이나 강냉이만 먹다가 쌀알이 들어간 죽을 먹을 수 있다는 일념에서
기대감은 엄청 높았다고 보여진다.
거기에 간간이 던져놓은 찹쌀 옹심이도 일품의 역할을 했다고 본다.
동짓날 아침에 팥죽을 양껏 먹고 지게를 지고 나무를 하러 가야했었다.
먹은 만큼의 일을 해야 하는 것 또한 당시에 과업이자 문화였던 것이다.
글을 다 쓰고 나니 우리 어멍이와 아버지가 눈에 선 하게 떠오른다.
이렇게 좋은 세상은 구경도 못하고 고생만 죽어라 하고 가신 분들이
안쓰럽기 그지없을 뿐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