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굼벵이도 구는 재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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굼벵이도 구는 재주가 있다.
굼벵이 하면 떠오르는 첫 번째 인상은 느림이 아닐까 싶다.
굼벵이가 뛰어 다닌다거나 날아다닌다는 것은 상상을 해 보지도 않았겠지만 그런 현상이 발생할 가능성도 높지 않으리라 본다.
그 동물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엉금엉금 기어서 어두침침한 곳으로 파고 들어간다는 것 이외에 큰 것을 바랄 수 있는 존재는 아닌 것 같다.
예전에는 밭갈이를 한다거나 초가지붕 개량을 할 때 굼벵이를 자주 볼 수 있었지만 현대 사회에서 온통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있는 구조에서 굼벵이 구경은 사육실에서나 할 정도가 되어 버렸다.
굼벵이를 키워서 애완용 곤충을 만든다거나 건강식품으로 제조하기 위하여 사육을 하는 터에 오히려 커 나가는 아이들은 실험실 상에 굼벵이를 더 많이 접하고 있으리라 본다.
실제로 굼벵이도 이제 돈이 될 수 있는 산업으로 구조 전환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굼벵이를 돈이 되는 도구로서 사용되는 것도 이 시대가 만들어준 상황논리라 본다.
돈도 좋지만 그 굼벵이가 우리에게 주었던 정서적 뉘앙스도 적지 않았으리라 본다. 굼벵이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보통의 관념에서는 느리게 자라면서 탈바꿈을 했을 시 기상천외한 모습으로 재탄생된다는 것이다.
굼벵이 시절을 벗어나 탈바꿈이 되면 매미나 풍뎅이 사슴벌레 등으로 변신이 된다.
아무리 생각을 넓혀서 상상을 한다하여도 굼벵이와 탈바꿈 된 후에 벌레들을 매치시킨다는 것은 상식선에서 수긍하기 힘든 면도 없지 않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인간이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을 자연은 자연스럽게 재현을 하고 있다고 본다.
굼벵이가 재탄생되어 상상을 초월하는 다른 곤충으로 거듭 변신된다는 것은 그야말로 기상천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굼벵이 시절에는 어찌하였던 굼벵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현실인 것이다.
이 굼벵이가 인간에게 시사 할 수 있는 문제점을 던져 준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살펴보면 재미있는 상상도 할 수 있으리라 본다.
우리는 굼벵이에 대하여 조금은 긍정적으로 판단하는 문장 하나를 가지고 있다.
세칭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라는 것이다.
하찮은 굼벵이에게도 많지는 않지만 재주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는 긍정적인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문장을 부정적으로 본다면 굼벵이는 구르는 것 이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존재라는 것이 그 안에 은연중에 내포되어 있는 모습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판단할 것인지는 그 문장을 접하는 사람들이 알아서 할 일이라 본다.
우리 인간세계에서 바라보는 굼벵이의 습성을 인간 양태에 견주어 보자.
굼벵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구르는 재주의 가치를 더 승화시켜 보자는 것이다.
인간에게 하찮게 보이는 굼벵이도 재주가 있는데 하물며 우리 인간은 어떻냐 이런 이야기다.
그래도 굼벵이의 재주 보다는 훨씬 더 많은 능력을 가진 동물이 인간이라 본다.
인간에게 불어 넣어 줄 수 있는 능력의 여력이란 것에 대하여 가늠하기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적어도 굼벵이에 재능에 비교해 보았을 경우에 그렇다는 것이다.
우리는 유년기에 능력이 있는 자를 오로지 국어, 영어, 수학을 잘 하는 것에다 초점을 맞추고 있다.
굼벵이의 능력이 구르는 것이라 하였을 시 인간의 능력은 도구과목의 공부를 잘 하는데 주안점을 둔 것이다.
요는 국영수만 잘 하면 인생이 다 펴지면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 인간계가 아닐까 생각된다.
잘은 모르지만 도구과목으로 밥 벌어 먹는 사람은 전 국민에 몇 %도 안 되리라 본다.
어차피 인간도 굼벵이처럼 자신이 가지는 최적의 주특기를 바탕으로 밥을 벌어먹고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천부적인 능력을 끄집어 내 주는데 굳이 국영수만 고집할 필요가 있겠는가에 대한 생각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천부적 능력이 국영수에 고착되었다면 주구장창 그쪽만 파면서 살아가면 되겠지만 현실은 그와 다른 영역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물론 국영수에 매력이나 자질을 가지고 있는 자는 그쪽으로 역량이 발휘되도록 교육환경을 조성해 주면 되리라 본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아이들까지 죄다 국영수의 연못으로 같이 데리고 갈 필요가 있는가 하는 생각도 들어간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국영수가 차지하는 비중은 한계가 있는 것이다.
세종대왕이 국영수를 잘 해서 그렇게 성군이 된 것은 아니라 본다.
그는 국어 이외 과목에 대해서는 잘 몰랐을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영어 부분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도 없는 영역이었으리라 믿는다.
현재 우리가 하고 있는 일에서 국영수가 얼마나 나의 인생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학교 근처에 가 보지 않았던 시절에 살았던 사람도 그 나라의 언어를 표현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능력을 신장시켜 주는 좋은 방법은 도구과목의 치중도 있겠지만 굼벵이가 구르는 재주처럼 인간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천부적 능력을 발굴해서 키워주는 과정도 중요하리라 본다.
우리의 교육은 너무 국영수에 의존하다보니 그 이외에 귀중한 능력을 가진 자들이 결국 그 뜻을 펴 보지도 못하고 인생을 종치는 경우가 많으리라 본다.
국영수를 못한다고 나무라기 전에 그 보다 더 가치있는 일을 발굴해 주지 못한 부모나 선생 등 기성세대에 대하여 책임을 돌려야 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의 교육은 너무나 획일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고등학교를 나와서 무엇을 배워서 미래에 어떻게 써 먹겠느냐가 아니라 수능 점수가 몇 점 나와서 어느 대학에 갔느냐가 중요한 포인트가 돼 버렸다.
청소년기에 공부를 한다는 게 수능점수를 올리는 쪽으로 올인 한다면 이것보다 더 획일적인 일이 어디 있겠는가?
물론 수능을 잘 봐서 좋은 대학에 나와서 좋은 직장에 가서 많은 봉급을 받고 행복하게 살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인간이 이 세상에 나온 가치를 발휘했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는지 의문시 된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고 본 우리의 선조들의 혜안도 대단하다고 본다.
보통의 사람들이 굼벵이를 보고 그렇게 심오한 의미를 도출해 낼 수 있을는지도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보다 훨씬 더 단순했던 당시 사람들의 인생사에서도 굼벵이가 인간에게 준 메시지를 예리하게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굼벵이에게는 마음껏 구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었을 때 그 굼벵이가 가지는 능력을 백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도 그와 별 반 차이가 없으리라 본다.
구르는 재주가 있는 인간에게 날아다니라고 다그친다면 과연 그 인간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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