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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길을 묻다 102 - ‘개’와 ‘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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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열흘 전, 초등 동창생들의 작은 모임에 초대를 받고 모처럼 강릉에 갔습니다.
친구는 저를 위해 특정 장소에 차를 대기하고 함께 점심 약속장소로 가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조수석에 앉았고 운전대를 잡은 친구는 또 다른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여인이 누군가를 찾는 듯 차속을 이리저리 기웃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나/ 여보게 저 친구 명숙이(여기서 그 여자동창 이름을 명숙이라 칭합니다.) 아니야?
친구/ 응 맞네. 수년 만에 만나니 나는 잘 몰라보겠네.
(차 속에 앉아있는 우리를 알아본 명숙이는 살가운 미소를 지으며 냉큼 뒷좌석에 오르고 셋은 반가움에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나/ 야~ 명숙이 반갑다. 오랜만에 만나니 잘 몰라보겠구나.
친구/ 그러게 말이야. 그런데 학교 다닐 때 좋아했나? 최교수는 어떻게 그리 명숙이를 금시 알아보는가?
그런데 말입니다.
순간, 나에게 뭐라도 씌었는지 불쑥 한다는 대답이 이랬습니다.
“개 눈에는 똥만 보이는 법이지...”
아차! 싶었습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지? 이 무슨 해괴한 망발이란 말인가. 마음에 없는 말일지라도 ‘미인은 원래 눈에 잘 띄는 것 일세’ 이렇게 말을 했어야 하는 것이 아니가...
(그 순간 운전대를 잡은 친구 역시 꼬여버린 사태를 짐작하고 내게 눈을 찡긋하고 급 수습에 나섰는데 이를 어쩝니까. 겨우 사태를 수습한다며 내뱉는 말이...
친구 / 아니, 그럼 너는 개고 명숙이는 똥이라는 말이냐?
나 / 아...아니 뭐 그냥 저기...그저... 이를테면 그렇다는 말이지...
(아~~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주워 담을 수도 없고...미쳤지..미쳤어! 말이라는 것이 이렇게 왜곡되고 비화되는구나 싶었습니다.)
나와 친구의 불쑥 내뱉은 말에 차속은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습니다.
숱한 말 중에 하필 비유가 그게 뭐람. 내가 ‘개’가 되는 것은 얼마든지 좋은데 수년 만에 만난 명숙이는 졸지에 ‘똥’이 돼버렸으니...
룸 밀러로 슬쩍 명숙이의 표정을 살피는데 아무리 허물없는 초등동창들 끼리지만 좋은 표정일 리가 없지요. 좁은 차안이라 귀싸대기가 안 올라오기 천만다행입니다.
‘세 번 생각하고 한번 말하라(三思一言)’고 아버지가 밥상머리에서 귀에 덕지가 앉도록 가르쳤건만...변명의 여지도 없고... 이럴 때 변명이라고 늘어놔 봤자 사태는 점점 악화일로를 걸을 것이고...
친구놈은 모임 내내 원인행위는 자기가 아니라는 듯 희희낙락 했지만... 이 주변머리는 점심 먹고 차 마시고 다섯 시간여를 안절부절하다가 명숙이에게는 안녕이라는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도망치듯 춘천으로 올라왔다는....
댓글목록
어단파파님의 댓글
어단파파 작성일
웃겨요, 웃겼어요.
대변인(친구)이 더 훌륭(?) 해요.
이런 실수 없었다면
누가 이런 글 쓰겠어요.
잔짜 좋아했었네요 뭐.
초등(국민) 학교 친구들은
아무 허물이 없어요.
특히나 우리 어릴 때는
개똥이, 쇠똥이 이름 많았네요.
귀할수록 천하게 불러야
귀신 시샘 따돌린다나.. ㅎ
김윤기님의 댓글
김윤기 작성일
어짜피 "명숙"이도 가명이고 "개눈에 똥"도 가상인데 염두에 두고 고민할 일은 아닐 듯
언제 들어도 정감이 넘치는 "개눈에 똥"이란 이 명제는 명숙이던 명자던 명희던 그 어느 이름에도 제법 잘 어울리는 영원한 오빠들의 숙식어가 아닐지.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