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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 아이를 먼저 떠나보내고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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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 아이를 먼저 떠나보내고 나서
나의 주변에는 새 생명의 태어남 보다 저승으로 가는 사람들이 더 많아짐을 느낄 수 있다.
젊은 날에는 태어남이 훨씬 많았던 기억이 나는데 요즘 와서는 이승에 이별을 고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이다.
물론 내 자신이 나이를 먹다보니 태어남보다는 이승과의 이별을 고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은 당연하리라 본다.
젊은 날에는 저승보다는 이승에 엄청난 가치를 부여했던 것도 부인치는 못하리라 본다.
인간이 어느 나이 대에 서 있느냐에 따라 이승과 저승에 관념은 다르리라 본다.
인간의 삶은 이승에 있을 때 의미가 있는 것으로 인식된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이야기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은 거의 본 적이 없다.
물론 이승이 너무 힘들어 자의적으로 저승을 선택하는 사람도 간혹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보통의 사고방식으로는 저승보다는 이승 쪽에 삶을 택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은 사실이다.
아니 인간의 본능을 저승보다는 이승 쪽에다 초점을 맞추어 만들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나이를 먹으면서 주변에서 이승을 떠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젊은 날에는 그런 것이 자연스러운 자연 현상이라 보았는데 나 역시 나이를 먹고 보니 이승을 떠나는 것도 그냥 자연현상으로 돌리기에는 아쉬운 점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으로 이승에서 가급적 오래 머물고 싶은 것은 어쩔 수 없다고 본다.
결국은 저승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면서 이승에 대한 애착이 더 강해지는지도 모른다.
저승에 대한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완화시켜 줄 수 있는 요인 중에 하나가 종교가 아닐까 싶다.
종교도 일종의 철학의 범주에 들어가리라 본다.
종교를 창시한 부처나 예수, 마호멧 같은 사람들도 새로운 방향으로 접근해 본다면 철학자의 영역에서 활동한 분이라 생각된다.
신자의 입자에서 보았을 때는 신성한 신적인 인물일지 모르지만 조금만 멀리 떨어져 보면 저승까지 언급한 철학자라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같은 철학을 해도 이승만 다룬 사람은 그냥 철학자인 것이다.
공맹자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같은 경우일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종교 창시자는 현재와 미래 그리고 그 다음 세계까지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 철학자는 과거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지금도 내세에 대한 관념을 객관화 시키면서 종교를 창시하는 사람도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쉽게 말하면 새로운 종교를 만드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내세에 대해서 언급한 철학자가 종교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기존의 기득권 종교를 신봉하는 입장에서 보았을 때에는 당연히 사이비라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워낙 다양하기에 어는 것이 정답이라 보기에는 한계가 있으리라 본다.
우리는 과거부터 유교적인 사고방식에서 저승과 이승을 다루어왔다고 본다.
물론 불교나 천주교 등의 종교관에 의해서 생각하고 행동해 온 경우도 있으리라 본다.
우리 전통의 사고방식에서 이승과 저승의 연결은 조상과 현실을 살아가는 후손과의 연결 관계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본다.
현실은 살아가는 사람도 언젠가는 조상이 될 수 있다는 관념인 것이다.
우리나라만큼 다양한 종교가 서로 간에 불협화음 없이 공존하는 나라도 드물다고 한다.
같은 종교끼리도 부딛끼는 형국에서 다원화된 종교를 가지고 분란 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것도 불가사의 한 일이라 생각된다.
좋게 말하면 우리는 종교적인 관점이 엄청 관대하고 넓다고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종교 분야만큼은 상대방을 객관적으로 인정해 줄 수 있는 원초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동일 종교를 국교 형태로 신봉하는 나라의 입장으로 보았을 때 대단하다고 느끼는 경우도 많으리라 본다.
종교만큼은 우리의 음식문화 중 비빔밥 문화처럼 서로가 섞여서 상생하는 능력이 타 민족에 비해 크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삶과 죽음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 다르다고 본다.
태어남에 대해서는 새 생명의 탄생 차원에서 바라볼 수 있지만 죽음에 대해서는 천차만별의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필자가 지금 저승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반론을 제기하고 싶은 생각을 가지는 사람들도 무진장 많으리라 본다.
아니, 많은 것이 지극히 정상이라 본다.
죽음에 정답은 없는 것이다.
정답이 없기에 생각의 영역은 끝이 없는 것이다.
엊그제 나의 제자 한명이 이 세상을 떠나갔다.
죽음에 대해서 아무리 미화를 한다하여도 그 자체에 대해서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젊은 나이에 이승을 떠난다는 것은 슬픔 이상의 그 어떤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노화로 인하여 저승으로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본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로 인하여 이승을 하직하는 경우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승에서 이별 아픔 이상의 아픔을 준다는 것이다.
예전에 노무현 전 대통령은 죽으면서 이런 이야기를 남겼다.
“삶과 죽음은 자연의 한 조각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아무리 삶과 죽음을 한 연장선상에 두고 싶다고 하여도 이승과 저승은 분명히 다르게 보일 것이다.
이승에 있으면 소주라고 한 잔 같이 나눌 수 있지만 저승에 가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더 큰 차원에서 보면 태어남과 죽음은 자연스러운 자연의 섭리로 밖에 달리 해석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단, 인간은 그것을 자의적으로 생각하고 해석하고 관념화 시켰을 뿐이라 생각된다.
보통 사람들의 생각은 이승과 저승의 거리가 너무 멀다고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 갭을 조금이나마 좁히고자 우리는 애도하고 슬픔을 같이 나누는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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