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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자국 선명한 선죽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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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규전 작성일 2018-08-09 10:28 댓글 1건 조회 75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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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핏자국 선명한 선죽교 2


원래 선죽교는 선지교라 불러졌는데 정몽주가 죽고 나자 다리 근처에 대나무가 솟아 났다하여 중간 이름자에
자를 넣었다고 한다.

시간적으로 그런 역사적인 사건이 있은지 이미 600년이 흘렀다.

그런데도 그 장면이 이땅에 후예들에게 생생하게 각인이 되는 것은 충신이 정권찬탈에 미친 사람들에게 죽음을 당했다는 것 이상의 감정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이성계의 철퇴를 맞고 쓰러진 선죽교에는 밤마다 울음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당시에 개성에 살았던 사람들은 정몽주를 보필했던 녹사 김경조의 원혼으로 인한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녹사비를 세웠는데 그 비는 항상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고 한다.

이를 두고 후세 사람들은 녹사의 충정이 남아있어 그 눈물이 마르지 않고 있다고 믿고 있다.

 

이런 역사적 현장 앞에서 자신의 입맛과 다르다고 그렇게 생명을 함부로 빼앗는 것도 큰 죄악이지만 그런 자들에게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지조를 지켰다는 충절의 표상이 더 크게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하지 못하고 남들도 하지 못한 일을 했을 때 비로소 그 가치가 더 크게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준 역사적 본보기가 아닐까 싶다.

작금의 우리 정치인 들 중에서 철새처럼 안방만 찾아다니면서 변절을 밥 먹 듯 하는 사람들이 뇌리를 스친다.

그런 변절자들이 가장 먼저 가 보고 반성해야 할 곳이 바로 선죽교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기록에만 그런 것이 남아있다면 하나의 역사적로 인식될 것이다.

그러나 선죽교에는 그런 기록을 뒷받침 해주는 증거자료가 명확하게 남아있음으로서 더더욱 그 당시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주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에 정몽주에게 철퇴를 가한 이방원 입장에서 왜 이렇게 상징적인 다리를 그대로 놔 뒀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행여나 그 다리가 말 안 듣던 정적이 쓰러진 곳이라는 것을 백성들에게 보여주면서 은근히 겁을 주기 위한 공간으로 생각했을는지도 모른다.

 

선죽교는 원래 난간이 없는 다리었다고 한다.

정몽주가 이방원 일당의 철퇴를 맞고 쓰러진 후 그의 후손들이 혈흔이 훼손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난간을 세워 보호를 했으며, 그 다리를 이용하기 쉽게 하기 위하여 옆에 난간이 없는 다리를 더 보강시켜 현재에 이르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거기에다 선죽교의 표석 글씨는 조선시대 명필이었던 한석봉이가 쓴 것을 조각해 놓았다고 한다.

미래 어느 날, 살아서 그 곳을 보러간다 했을 시 정몽주는 물론 한석봉까지 동시에 회상할 수 있는 기회도 얻을 수 있으리라 본다.

 

우리의 역사에서 고려는 허리 정도 되리라 본다.

고조선에서 현대까지 오는 가운데 중요한 역할을 한 부분이 고려라 보면 될 것이다.

고려는 곧 우리의 역사인 것이다.

살아있는 그 역사의 현장이 서울서 멀리 떨어지지도 않은 개성에 있는 것이다.

이역만리 먼 곳도 하루면 다 갈 수 있는 세상인데 지척에 둔 개성도 못 가보는 우리들의 현실이 그저 딱하기만 한 것이다.

한심스럽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렇게 귀한 우리의 땅,

누가 개성 가는 길을 막고 있는가?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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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양님의 댓글

세양 작성일

그 기록을 그대로 둔 이방원의 그릇이 더 큼을 증명한다고도 할 수도 있답니다.
근간에 역사학자들이 새로운 방향으로 역사를 풀어가니 역사의 폭이 훨씬 풍부해
진듯 한데 공부하는 학생들은 헷갈리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역사는 하나인데 해석은
몇가지 . . . 옳든 그르든 더 많은 사람이 지지하는 것이 바른 역사일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