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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길을 묻다 127 - ‘하 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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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에이포 작성일 2019-01-14 12:17 댓글 3건 조회 1,04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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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하 19, 체감온도 24.

춘천의 겨울은 매우 춥다.
잠자리에서 일어나기 조차도 쉽지가 않다. 극도의 귀차니즘에 빠져 오늘 아침에는 커피 한잔에 식빵 한 조각을 우걱우걱 입속에 구겨넣어 아침밥을 대신했다  

지난 크리스마스와 함께 방학이 시작되었다. 이번 겨울 방학이 어쩌면 생애 마지막 방학이 될지도 모른다. 손을 곱아보니 살아오면 여름방학 겨울방학 봄방학까지 그렇게 한해에 세 번씩 70여 번의 방학을 보냈다  

아내는 행여 저녁형 인간의 아침잠을 깨울까 우렁각시처럼 몰래 출근을 하고, 요즈음은 상대적 보상심리 때문인지 혼자 일하러 나간다는 유세로 설거지도 온전히 내몫이 되었다  

오늘은 김치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내어 썰었다. ‘미안하지만 만두거리 김치를 좀 썰어 놓세요라는 아내의 은근한 압박성 지령(紙令)이 식탁위에 놓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보아하니 아내는 요즈음 나에게 셀프 밥상차림을 조금씩 훈련을 시키는 눈치다.

그런데 마눌님의 당부에 따라 김치 몇 포기를 썰어 채운 보조용기를 냉장고안에 넣고 손을 씻으려는 순간 나는 그만 울컥하고 만다. 행여 비닐장갑을 끼고 김치를 썰다가 서툰 칼질에 손이라도 벨까 조심스러워 손을 정갈하게 씻은 다음 맨손으로 김치를 썰었더니 마치 봉숭아 물 들인 것처럼 손톱들이 빨갛게 물이 든 것을 발견한 순간부터다  

아홉남매 중 일곱 번째 늦둥이로 어머님 날 낳으시고, 한참이나 일찍 태어나신 누님 날 기르시니... 누님은 해마다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이면 선홍빛으로 곱게 피어난 봉숭아꽃을 따서 백반을 버무려 여린 호박잎사귀에 싼 다음 정성스럽게 손톱마다 무명실로 꽁꽁 처매주곤 했다. 그 봉숭아처럼 곱던 누님은 이미 이 세상에 없다. 다시는 만날 수 없는것이다.   

때마침 아무렇게나 켜놓은 tv에서는 무슨 드라마 배경음악 같은데 한껏 슬픈 음악이 흘러나오고, 나는 어린시절 누님이 물들여 준 봉숭아 손톱인양 행여 씻겨나갈까 조심스럽게 개수대에서 행군다음 쇼파에 앉았는데, 그때부터 이런 저런 흑백필름들이 오버 랩 되는가 싶더니 나도 알 수 없는 눈물이 한여름 소나기 내릴 때 양철 처마끝 처럼 마구잡이로 흐르기 시작했다. 아니, 까이꺼 혼자 있는데 뭐 어때 라고 콧물까지 힝 힝 풀어가며 꺼이꺼이 울어버렸다.  

살아가면서 가끔씩은 이런 날도 있다. 어쩌면 내 생애 마지막 방학, 요즈음 나의 '하루'다.

우쒸! 당분간 아내가 출근을 할 수 없도록 밤부터 눈이라도 내 키만큼 내렸으면 좋겠다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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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연2님의 댓글

김석연2 작성일

누님에 대한 진한 정이 읽혀서 나도 코끝이 찡해 옵니다.
지금은 떠나고 없는 시골에 살던 부모님의 잔정이 가슴에 사무치게 그리움으로 다가오기도 하고요.
가슴에 와 닿는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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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단파파님의 댓글

어단파파 작성일

저희는 7남매였습니다
요즘 같았으면 출산장려금+육아수당=(?)으로
부모님들 등골 휘는 일 좀 덜했을 텐데..
보릿고개 넘으며 지지고 볶고 하면서도
위계질서는 지키면서 자랐습니다.
누님들의 보호본능은
진하게 떠오르는 추억입니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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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포님의 댓글

에이포 작성일

칠남매, 구남매면 거의 유아원 수준이지요.
요즈음에는 선생님 두세분 있는 분교장도 됩니다.
아침마다 도시락을 가지고 한바탕씩 전쟁 치르고
비라도 내리는 날에는 우산을 가지고 또 한바탕 전쟁치르고
치르고 치르고 치르고...
지금은 생각만 해도 눈시울이 붉어지고 붉어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