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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의 정림사지5층석탑을 보고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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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의 정림사지5층석탑을 보고 왔습니다.
가을의 맛이 절정을 이루는 10월 마지막 주말에 충남 부여 쪽으로 다녀왔다.
오가는 길목은 단풍으로 치장되어 어딜 봐도 한 폭의 그림과 같은 형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인간이 볼 수 있는 한계가 더 있다면 구석구석 모조리 볼 수 있었을 터인데 그렇지 못함이 아쉬울 뿐이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던 ‘주마간산’이란 말이 실감날 정도이다.
분명히 아름다운 세계는 펼쳐지는데 그것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과거처럼 괴나리봇짐을 지고 다니던 시절 같으면 주변에 아름다움을 죄다 보면서 오갈 수 있을 터인데 하는 생각도 들어간다.
이렇게 좋은 경관이 일 년 내내 펼쳐진다면 인간의 감성은 새로운 방향으로 틀어졌겠지만 이런 장면도 잠깐이면 지나가는 터에 이런 것은 이때가 아니면 볼 수 도 느낄 수도 없는 귀한 장면이라 생각된다.
도로가 아무리 좋아졌다하여도 부여까지의 거리는 멀었다.
가던 날이 장날이라고 날씨가 궂은 바람에 고속도로, 국도, 고속도로, 국도를 타고 가는 과정이 생각보다 쉽지는 않았다.
물론 과거 시절에 꼬부랑길보다야 낳았겠지만 운전하는 데는 용이치 않았다.
거리는 어느 정도 되는지 가늠하기 용이치 않았지만 대 여섯 시간 정도 걸려서 부여에 도착하였다.
하룻밤을 묵은 다음날 아침은 빗물을 먹음은 대지와 푸른 하늘, 그리고 어제 온 비로 인하여 한층 맑아진 공기가 아침 기분을 업 시켜주고 있다.
아침을 만들어 먹고 간 곳이 백제 시대에 건립되었다는 정림사지 오층석탑으로 차를 몰았다.
부여가 과거의 백제 수도였지만 지금은 지방의 중 소 도시 정도로 남아 있었다.
여기서 군사를 몰아 신라와 당나라, 그리고 고구려와 맞짱을 떴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남다르게 다가온다.
또 다른 역사의 기록으로 우리네 머릿속 깊이 남은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이 생각나면서 패망할 당시 궁녀 3천명이 낙화암에서 떨어졌다는 설이 뇌리에 떠오른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많은 여인들이 낙화암에서 떨어져 자결을 했다는 식으로 많은 과대 포장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어간다.
천 여 년 이상을 거처 오면서 부여라는 곳도 참 많은 사연과 애환을 바탕으로 지금까지 내려 왔다고 본다.
기록에 없는 스토리는 모두 망각의 세계로 가고 남은 것은 우리의 인식세계에서 볼 수 있는 것 만 있으리라 본다.
그 중에서 유명한 것이 지금 소개시켜 드리고자 하는 정림사지 오층석탑이 아닐까 싶다.
우리나라에서는 유명세를 타기 위해서 초 중 고등학교 교과서에 한 소절이라도 소개되어야 한다는 맹점도 있다는 것이다.
가는 주변의 간판에는 백제라는 글자가 생각보다 많이 보인다.
필자가 교육에 몸담고 있어서인지는 모르지만 초등학교 중학교 이름 앞에도 백제라는 이름이 들어가 있는 경우가 유독 돋보였다.
“뭣 눈에는 뭣 만 보인다.”는 이야기가 실감나는 대목이다.
그리고 정림사지로 가는 길목에도 옛날 고풍스러운 모습들이 간간히 보이는 것으로 보았을 때 이 도시가 백제의 고도였다는 것을 은연중에 보여주고 있었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는 순간 눈앞에 탑과 함께 뒤편에 큰 건물이 보인다.
사찰하면 산 중을 생각하는데 이 절은 평지에 건립되어 있었음으로 주변에는 큰 산들이 보이질 않는다.
입장하는 과정에서 많은 관람객과 같이 들어가게 되었다.
입구를 지나 조그마한 연못을 만나게 되었는데 거기서 명장면이 나오는 것 같은지라 많은 사람들이 스마트폰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었다.
우리도 그 대열에 끼어 셔터를 누르기 바빴는데 그 옆에 모 중학교 운동선수와 코치가 같이 있게 되었다.
그런데 그 선수를 인솔한 젊은 코치가 하는 말 “얘들아 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불편하지 않게 자리를 좀 비켜 주어라.”라고 한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나이가 든 관람객은 우리 팀 밖에 없었는데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은 우리를 대상으로 한 말 같았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의 귀를 의심하면서 반문을 하였다.
"우리는 아직까지 할아버지 할머니 대열에 끼지 않았으니 차후부터는 아저씨라 불러달라."고 이야기 하였다.
그러자 우리 일행 중 하나가 “ 뭐 그런 걸 가지고, 이미 그 대열에 끼여 있으니 그만 하자.”라고 한다.
졸지에 할아버지 대접을 받으면서 씁쓸한 여운을 간직하고 탑 관람을 다시 시작하였다.
만추의 정림사지 5층 석탑은 주변에 박물관, 뒷편에 큰 건물 그리고 주변에 주춧돌, 연못, 잔디밭 등이 어우러져 색다른 맛을 풍기고 있었다.
책에서야 많이 보았지만 실제로 본 탑은 생각보다 좀 큰 편이었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탑들과 비교했을 때 뭔가 중후한 느낌이 더 간다는 인상을 받았다.
과거에 영화로웠던 사찰은 대부분 사라지고 주춧돌만 남은 가운데 달랑 탑이 서 있는 관계로 세월의 험한 부침을 보는 것 같아 비감한 마음 가눌길 없었다.
탑에서 박물관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커다란 모니터에는 정림사지 오층석탑 주변에 완전한 건물로 둘러쌓여 있는 가상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우리나라와 같이 관광자원이 절에 국한 된 경우, 이렇게 좋은 바탕이 있는데 왜 복원을 하지 않는지 이해를 하기 힘들었다.
큰돈을 들이지 않고도 엄청난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좋은 여건을 그대로 방치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종교적 차원에서 복원을 해도 되겠지만 그것이 부담된다면 문화적 차원에서 복원을 하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간다.
우리 강릉의 경우도 학산의 굴산사지가 오버렙된다.
이렇게 좋은 바탕의 자원이 있는데 그것을 사장시키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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