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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 문화예술

길 위에서 길을 묻다 83 - ‘옛날에 금잔디 동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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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에이포 작성일 2017-10-18 19:36 댓글 2건 조회 81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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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길을 서둘러 수년 만에 동문체육대회에 참석합니다.

그래봤자 오후의 도착이었지만 오랜만에 두발로 밟아보는 교정은 전과 다름없이 정겨웠고 밝은 웃음으로 반겨주는 동기들의 모습에서는 오래 묵은 된장 같은 정감이 묻어납니다.

손수 차를 운행해야 했기에 마음을 다해 부어주는 동기들의 술잔을 받지 못하는 미안함에 잠시 담소를 나누다가 슬그머니 부스를 벗어나 언제나 늘 푸른 모습으로 동문들의 표상되고 위로가 되어주는 삼나무 밑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열대식물이 즐비하던 온실이 있던 자리, 능수버드나무가 파수를 하던 농기구창고, 삽목한 주목들이 줄지어 푸르르던 싹다리과 실습장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봄부터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바지런을 떨던 김홍철 선생님의 흔적도 발견할 수 없고 , 호랑이 같았지만 끝까지 후배들을 감싸 안던 정맹화 선생님의 우렁찬 목소리도 안 들립니다. 토끼같이 동그란 눈을 뜨고 바쁘게 교정을 누비며 뭇 학생들의 속을 태우던 서무과 혜숙이 누님은 지금쯤 곱게 나이든 할머니가 되어있을 것입니다.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잔뜩 눈독을 들이고 있던 선배들을 제켜내고 데이트에 성공했을 때, 그 때 왜 좋아한다고 고백하지 못했을까?   

몇 걸음 더 발길을 내딛어 매점이 있던 자리를 지나 도착한 곳은 뒷동산을 오르던 계단 부근입니다. 밴드부원들이 선배들의 불호령에 치뛰고 내리뛰던 계단은 어디가 어딘지 그 위치마저 알 길이 없습니다. 듬성듬성 잔솔밭과 잔디가 깔려있던 계단 끝 뒷산 꼭대기는 참 사연도 많았지요.

친구의 꼬임에 빠져 하필 그날, 인생의 첫 담배를 피우다가 규율부 선배들에게 결려 어질어질한 정신을 가다듬으며 쪼그려 뛰기를 당하기도 했고, 농학도에게는 어울리지도 않는 성악을 하겠노라고 목을 틔우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곳도 그 금잔디 동산이었습니다.  

자천 타천 문학소년이었던 그 시절, 꿈을 키우던 그 옛날의 금잔디 동산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사라지고 잡풀만 가득하더군요. 울컥, 목젖을 타고 오르는 아쉬움을 억지로 참아냅니다  

옛날에 금잔디 동산에
매기같이 앉아서 놀던 곳
물레방아 소리 들린다 메기야 네 희미한 옛 생각

(~~~ 옛날이여!)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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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단파파님의 댓글

어단파파 작성일

아침저녁 서늘해졌습니다.
군불짚인 아랫목같은 글 읽습니다.
그 혜숙이 누님은 화롯불~.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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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포님의 댓글

에이포 작성일

콩깍지가 씌어서였던가요?
요즈음도 흐려진 기억 저편에서 이따금씩 다가서는...
두 살 연상의 참 깜찍한 외모에 야무지고 도도하기만 했던 여인이었습니다. 
인연은 아니었던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