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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강사의 강의 청취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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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규전 작성일 2018-03-30 11:59 댓글 0건 조회 61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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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사의 강의 청취록


   빈곤하던 시절에는 배만 부르면 모든 것에서 다 만족감을 느꼈다. 어느 정도 밥숟가락을 떠 넣을 정도가 되면서 배부른 것 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세상으로 들어가게 된다. 미국의 심리학자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에서 가장 밑바닥인 식욕, 수면욕, 성욕을 충족하면 그 윗 단계로 옮아간다는 이론으로 인간의 욕구라는 것은 어느 한 곳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욕구를 요구하면서 결국에는 자아의 실현쪽으로 가게 된다는 것이다. 자아의 실현을 좀 더 쉽게 표현한다면 이 세상에 태어나 자신과 타인을 위해서 가장 격이 높은 일을 이루어 내는 것 쯤으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가장 강하게 요구하는 욕구가 삶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생리적 욕구의 충족인 것이다. 먹고 마시고 자고 숨 쉬는 것이 안 된다면 생명 자체를 보전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충족되면서 인간은 다른 의식세계를 갈구하게 된다. 거의 짐승들과 별반 차이가 없는 생리적 욕구 단계를 벗어나 타 동물이 가지지 못하는 차별화된 영역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이 영역에 들어서게 되면서 인간과 인간의 능력과 격의 차이가 발생되게 된다. 이를 실현하기 위하여 책도 일고 글도 쓰고 학교도 가고 자신 보다 나은 스승을 찾아가기도 한다.

 

   “三人行必有 我師라고 나 보다 생각의 영역이 넓고 많은 경험을 한 사람을 스승으로 생각하게 된다. 물론 직접 스승으로 모시는 경우도 있겠지만 스승이라 생각하는 경우도 많이 있으리라 본다. 이런 것은 지극히 자의적인 판단이라 본다. 우리의 스승은 학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본다. 나의 부족분을 채워줄 수 있는 대상은 죄다 스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일전에 홍천에서 접경지역미래발전연구소 주관 시국 강연회가 있었다. 강사는 우리에게 익숙한 김용* 교수님이셨다. 텔레비전에서는 낮이 많이 익었으나 현장에서 볼 수 있는 기회는 한 번도 없었다고 본다. 저녁 시간대에 치러지는 행사인지라 우정 시간을 내서 참석하게 되었다. 그 분의 강의는 매체를 통하여 많이 들었었지만 홍천이라는 곳을 콕 찝어서 강의를 듣는 다는 것은 색다른 의미를 부여할 것 같았다.

 

   강의 장소가 홍천군문화센터라기에 당연히 문화회관인 줄 알고 찾아갔더니 절간처럼 조용하였다. 관리하시는 분에게 여쭈어 보았더니 그 장소가 여기가 아니고 문화센터라고 하였다. 급히 발길을 돌려 연봉리에 있는 문화센터로 갔다. 그러는 과정에서 예정 시간을 약간 넘겨서 부랴부랴 들어가게 되었다. 강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기 위하여 초청 가수의 노래도 들었다. 강의 오프닝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이었다.

 

   강의 전에 접경지역미래발전연구소 소장님께서 이번 시국 강연을 하게 된 동기와 배경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이 있었다. 사실 여기에 강의를 들으러 온 사람들의 대다수는 본론을 듣기 위해서 왔는데 주최 측은 서론에 대해서도 엄청 중요시 하는 것 같았다. 이런 특강이 성사되게 된 배경을 알아야 강의를 더 효율적이고 집중적으로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었던 것 같다. 이러다 보니 시간이 좀 흘렀다. 본론을 듣기 위하여 이 정도의 멘트는 양념으로 들어줘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불만 없이 임하였다.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이어서 등단한 강사님은 출발부터 신선한 액션으로 접근을 하였다. 보통은 단상에서 강의를 하는데 이 분은 단하에서 강의를 하겠다면서 칠판을 단상에서 단하로 끌어 내렸다. 가급적이면 청중들과 같이 호흡을 하면서 강의를 하겠다는 일념으로 가득차 있었다. 어찌보면 프로 중에 프로급의 강사인지도 모른다. 어떻게 해야 청중이 좀 더 감동있게 들을 것인가에 대해서 세세한 배려인지도 모른다.

 

   홍천을 배경으로 역사와 의식에 관한 내용을 홍천시민들에게 체계적으로 들려주고자 애를 쓴 흔적을 강의 초반에 말씀하신다. 오늘 이 강의를 위해서 아침부터 사연이 들어있는 홍천의 곳곳을 다 가 보셨다고 하였다. 홍천의 역사도 충분히 조사를 해 가지고 오셨다. 강사의 이야기 중 홍천의 지명이 언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는데 지금도 그 기억이 생생하다. 청중은 강사의 이야기를 듣고 감동을 받으면서 그 내용을 자기 것으로 소화해 주길 원할 것이다. 홍천이란 지명은 고려시대에 작명이 되어 불러지기 시작했으며 지금부터 1000년 전인 1018년에 붙여졌다고 한다. 이것이 뭐 그리 대단하냐고 말 하겠지만 청중이 강사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을 수 있게 함은 물론 그것을 오랫동안 기억하게 할 수 있는 것이 강사의 능력인 것이다.

 

   강의를 하는 과정에서 역사부분은 상당히 조심스럽게 접근을 하였다. 원래 역사라는 것은 자의적인 판단이 들어갈 소지가 상당히 많은 학문이라는 것을 그 강사는 훤히 꿰뚫고 있었다. 자기의 판단과 소신대로 잘 못 이야기하다 청중들로부터 비난의 화살을 맞을 수 있다는 것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그 분이 하고 싶은 진정한 이야기를 다 들을 수 없었다는 것이 조금은 흠이었다. 물론 그분과 달리 생각하는 사람에 대한 세심한 배려차원도 있었겠지만 실제로 그분의 진정한 생각을 들으러 온 사람에게는 눈치 보는 듯 한 인상도 지울 수 없었다. 게다가 일부 청중이 대 놓고 동영상을 찍는 모습을 그 강사가 보았다. 그로 인하여 그 강사의 강의는 더더욱 위축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기억 남는 부분이 홍천 백우산에 애기 장사 이야기에 필이 꽂힌다. 아이를 갖지 못하는 어느 부부가 천신만고 끝에 얻은 아이가 비범한지라 이를 끝까지 키워서 나라의 인재로 쓰이게 해야 되는데 그 반대로 갔다는 것이 이야기의 줄거리였다. 조선시대에는 잘난 사람이 발을 붙이지 못하게끔 고약한 사회 구조로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아기장수가 비범한지라 그것이 알려지면 부모와 집안의 멸화를 가져올 것을 두려워해서 그 부모가 그 아이를 죽였다는 설화를 소개하면서 조선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이야기 하였다. 그 흔적이 아직까지 남아 있어서 남 잘되는 꼴을 못 보는 풍조가 있다는 것이다.

 

   애기 장사 이야기가 과거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진행 중이라는 것이 그 분 이야기 논조의 골자인 것 같았다. 지금도 이 사회에서 특별하게 잘 나가는 사람들을 놔두지 않는 다는 것이다. 남 잘되는 꼴을 못 본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사회라던가 국가를 새로운 세계로 리드하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하늘이 내려준 귀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인데 한국사회는 아직까지 그들을 제대로 인정해 주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오버렙되어 떠 오른 사람이 있었으니 황**박사였다. 물론 황박사가 도덕적으로나 윤리적, 종교적, 의학적으로 하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발상 자체는 대단했다고 보는데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의 돌팔매 짓에 우리 사회에서 매장된 하나의 사례가 아닐까 싶다.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종교적인 면에서도 언급이 되었다. 기독교와 불교, 천주교를 넘나들면서 이야기가 이어졌다. 우리가 종교 생활을 하기 위하여 절이라던가 교회를 가게 된다. 거기서 목사님이나 신부님, 그리고 스님의 설법이나 설교, 강론을 통하여 일반 신도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게 된다는 것이다. 원래 종교의 창시자가 복음을 전도하는 것이 좋으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함으로서 종교 관련자 분들이 대리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종교시설에 가는 목적이 창시자의 얼굴을 보러 가는 것이 맞는가 아니면 그 사람의 말을 들으러 가는 것이 맞는가에 대해서 말씀이 있었다. 복음은 말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창시자의 비주얼을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사상을 들으러 간다는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인데도 그 대목에서 필이 많이 왔다는 사실이다.

 

   동학에 관해서도 많은 시간을 할애하셨다. 동학은 서양학에 반해서 우리 스스로가 주체적으로 설립한 이념이자 철학으로서 가치를 발휘했다고 평가를 하였다. 실제 조선시대에는 유교적 이념에 젖어서 다른 사고방식이 삐집고 들어갈 여유가 없었었으나 구한말부터 서양문물이 물밀 듯 들어오면서 새로운 세대의 문이 열렸다고 본다. 이 시점에서 동학이라는 것이 우리나라에서 태동하며서 홍천쪽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그 분의 지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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