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동문 문화예술

행복은 불행이 준 선물

페이지 정보

작성자 조규전 작성일 2018-03-23 09:44 댓글 0건 조회 654회

본문

                                    행복은 불행이 준 선물

   불행은 행복하지 않다는 의미의 단어이다. 행복을 알아야 불행을 알 수 있다는 이야기고, 역으로 표현한다면 불행을 모르고는 행복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행복과 불행의 잣대는 개개인 마다 다 다르다고 본다. 동일한 잣대가 존재한다면 그 레벨 이상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다 같은 생각으로 살겠지만 인간세계에서 그런 상황은 존재하지 않으리라 본다.

 

   행복과 불행만큼 상대적인 개념도 없으리라 본다. 행복이라는 척도는 불행에서 나오고 불행의 척도는 행복에서 나온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이 무엇이냐고 물어봤다고 하자. 대다수의 사람들이 어떤 답을 하겠는가? 가장 손쉬운 대답이 자신의 인생에서 불행이 없어지는 것이라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불행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물었을 때 그 답은 우리 스스로가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에는 재산의 많고 적음을 행 불행의 척도로 삼았던 적도 있었다. 지금도 돈이 없는 사람은 돈이 많음이 곧 행복이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없는 것 보다야 있는 것이 행복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돈이 가장 많다고 알려진 이**이 가장 행복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될 것이다. 하지만 그 분은 병상에 누워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 상황을 행복하다고 인정할 수 있겠는가? 물론 극단적인 비유가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돈이 곧 행복이란 등식은 돈 자체가 많이 아쉬운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억만장자의 행복도가 높을 것인가 아니면 땟거리가 없어서 전정긍긍하던 사람이 취직을 해서 첫 봉급을 받고 안정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의 행복도가 높을 것인가에 대해서도 그 답을 구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계속 돈이 많던 사람은 돈에 대한 고마움이나 감각이 떨어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들은 돈보다 다른 세계에서 행복을 찾으려 노력할 것이다. 갑부에게 몇 백만 원 던져주었을 때와 가난한 자에게 몇 백 만 원을 주었을 때 느끼는 행복감은 분명히 다를 것이다. 동일한 금액의 돈이지만 갑부에게 몇 백만 원 던져줘야 고맙다는 인사도 듣기 어렵지 않을까 싶다.

 

   행복은 지극히 상대적이라 본다. 물이 0도에서 얼고 100도에서 끓는 것은 절대적이다. 정해진 온도에서 빈틈없이 상의 변화가 일어난다. 하지만 행복은 절대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상대적인 현상이 행복이라 본다. 한 여름 땡볕에서 진땀을 빼고 일 한 사람과 멋진 부폐식당에서 배부르게 음식을 즐긴 사람에게 시원한 생맥주 한잔씩 주었다고 생각해 보자. 동일한 량의 생맥주를 받았지만 받는 대상자가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 느끼는 행복도는 하늘과 땅 차이만큼 크리라 본다.

 

   행복을 크게 느끼기 위해서는 불행도 커야 한다는 것이다. 산이 깊으면 골이 깊다고 했다. 행복 지수가 마냥 높아진다는 것은 인간세계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 본다. 행복의 밑거름은 불행에서부터 온다는 것이다. 세상에 마냥 행복이라는 것은 존재하기 어렵다고 본다. 돈이 무진장 많은 사람이 죽을 때가 되었다고 가정하자. 이 사람이 과연 두 눈을 자연스럽게 감고 죽을 수 있을 것 같은가? 반대로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이 때가 돼서 죽게 되었다. 같은 죽음이지만 어떤 사람이 죽을 때 덜 불행하게 느끼면서 눈을 감을 것인가에 대해서 우리 스스로가 생각해 보자. 비유가 좀 지나친 면도 있지만 행복과 불행은 생각하기 나름에 따라 다양하게 반응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행복을 맛보려고 일부러 불행을 찾으러 다닐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행복을 먼데서 찾으려고 하지 말자는 것이다. 인간사에서 거창한 행복은 일생에 기껏해야 한 두 번 있을까 말까 할 정도일 것이다. 그러기게 우리는 신기루 같은 행복을 꿈꾸면서 하루하루를 보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오늘 보다 더 나은 삶이 내일에 있겠거니 하면서 오늘의 고충을 감내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실제로 내일을 맞이해 봐야 별로 달라진 것은 없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끊임없는 미래의 행복을 좇아서 오늘의 역경을 참고 견디는 것이다. 실제로 내일이라 해도 별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알지만 마음속에는 오늘 보다 내일에 좋은 일이 더 일어나리라는 망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결국 인생에서 오늘이 제일 힘든 날이 될 수 도 있다는 것이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그렇다면 천국에 있는 사람은 행복할 것인가? 우리가 생각하는 천국은 그야말로 지상의 낙원이 영속되는 공간으로 인식되어져 있다. 거기에는 불행이라는 싹 조차 없는 곳으로 상상되어 지는 곳이다. 일 년 내내 인간이 느끼는 최적에 기온에다 꽃은 늘 만발하여 있다. 먹을 것 입을 것 어는 것 하나 부족함 없는 곳이다. 아픔이나 슬픔이나 고통 따위는 더더욱 있어서는 안 되는 곳이다. 갈등이나 시기, 질투 같이 인간의 사악한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모든 것은 안락에서 시작하여 안락으로 끝나는 곳이라 생각한다. 가 보지 않아서 잘 알 수는 없지만 이런 곳에서 행복은 어떻게 찾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

 

   당연한 것으로는 행복을 느낄 수 없다고 본다. 아침이 밝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 본다. 물론 아침이 밝아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는지는 모르지만 밝아서 느끼는 것 보다 아침을 건강하게 맞이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감사의 행복감이 더 클지도 모른다. 봄날에 꽃이 피는데 대해서 벅찬 감동을 느끼는 것도 겨울철에 꽁꽁 얼었던 대지가 풀리면서 새 생명이 싹트는 것에 대한 감정에 반응인 것이다. 일 년 내내 꽃이 핀다면 그런 진한 감동을 받을 수 있을는지도 의문시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건강하다는 것에 대한 행복도 건강하지 않았을 때의 괴로움에 대한 반사의 감정이 더 큰지도 모른다. 평생 감기한 번 안 걸린 사람이 건강에 대한 행복을 더 느낄 것인가 아니면 골골 하는 사람이 어느 날 건강을 되찾았을 때 행복을 더 느낄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면 어느 정도 답이 나오리라 본다.

 

   인간의 행복의 척도는 자신의 마음속에 있다고 본다. 필자는 수도관에서 물이 나올 때 마다 엄청난 행복감에 젖는다. 거기에다 따뜻한 물까지 나온다면 그야 말로 금상첨화인 것이다. 수도꼭지에서 물 나오는 게 뭐가 대수라고 그렇게까지 행복감을 느끼냐고 반문을 할는지 모르지만 지난 겨울 혹한기에 몇 주 동안 물이 안 나와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물 나올 때 마다 눈물이 나올 지경으로 행복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행복은 자신들의 마음속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같은 일이나 현상을 보고 어떤 사람은 행복감을 느끼는 반면 또 어떤 사람은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행복을 느끼기 위하여 굳이 불행을 사서 경험할 필요는 없겠지만 매사를 행복의 척도에 긍정적인 측면에 올려놓고 살아가면 행복의 맛을 더 다양하면서도 깊게 느끼지 않을까 싶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