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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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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鄕
나는 고향을 자주 찾는 편이다.
엎어지면 코가 닿을 지근거리이기도 하지만 고향땅을 딛고 있기만 해도 몸에서 힘이 솟는 것 같아
한달에 두세번 정도는 가 보곤 한다.
5년전, 고향땅에 묻혀있던 5대조부터 부모까지의 산소를 양양으로 이장을 한 일이 있었다.
각지에 흩어져 있는 산소는 이제 관리할 자손들도 많지 않아 정리할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형제들이 모여 중론을 거친 후 양양문중묘원으로 이장을 하게 된 것이다.
일가 친척들도 다른지방으로 이사를 가거나 돌아가신분들이 많아 고향땅은 이제
연고가 없는 고향이 되고 말았다. 어렸을때부터 같이 크고 우정을 함께 한 친구들도 고향을 뜨거나
먼 세상으로 가버린 고향은 내 입장에서 보면 삭막하기 그지 없는 땅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사람은 가고 없어도 고향땅은 100년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그 길, 그 논두렁,
그 언덕이 그대로이고 나무하던 먼산의 모습도 그대로이다.
자주 찾는 이유가 그곳에 있다.
10월 어느날 벼가 누렇게 익어 황금 들판이 되었을 때 고향엘 갔었다.
태백준령이 첩첩이 쌓인 저곳 저 험준한 산을 넘으면 영세라고 어렸을 때 할머니한테 들었던 기억이 있다. 영서지방을 할머니는 영세라고 알려줬고 친척분들이 오면 그중에 어느 한분 한테는 영세할아버지가 오셨다고 했다.
눈이 내리길 기다리면 저 높은산에 눈이 세 번 와야 마을에도 눈이 온다고 가르쳐 주시던 할머니의
그 높은 산은 60년전이나 지금이나 변한것이라곤 하나도 없다.
높은 산 아래 널따랗게 펼쳐진 벌판, 벌판 한 가운데로 흐르는 개울, 그 개울가에 붙박이처럼 자라고 있는 버드나무, 버드나무 밑에 살고 있는 미꾸라지와 기름종아리, 오후 햇볕을 즐기는 소금쟁이, 강안에 퇴적된 모래톱과 조약돌, 그 조약돌을 귀에 대고 물을 빼는 여름철 악동들.
고향은 길가에 핀 이름도 알수 없는 꽃송이 마저 정겹다.
하물며 곡식이 알차게 영글어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른 저 황금들판을
눈으로 보지 않고야 서러워 잠이 오겠는가?
고향이 얼마나 소중한지는 몇해전에 다큐멘터리극을 보고 난 후에 절실하게 다가왔다.
소양강댐은 1967년에 착공하여 1973년10월에 완공된 다목적 댐이다.
이 댐을 건설하기 위해 수몰예정지역의 마을은 다른곳으로 이전하였고 정든 학교는 폐교되고 말았다.
다큐멘터리극에 출연했던 촌로는 농부가 아닌 어부로 변신되었고 고향이 그리운 날이면
물속에 잠긴 고향땅 부근 물위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간다고 했다.
추석날이나 설날등 명절이면 갈 수 없는 고향이 그리워 사무친다고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히 떠 오른다.
갈수 없는 고향은 분단된 북녘땅만 있는게 아니었다.
가슴에 묻어만 두고 자라는 아이들 볼세라 혼자만 흘려야 했던 눈물이 한두해일까?
고향에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으면 어떠한가?
친구들이 다 떠나고 말할 상대가 없으면 어떠한가?
밤나무 사이로 난 좁은 길, 감 따먹던 뒷동산, 솔바람소리 요란했던 소나무 군락지,
삿갓봉 너머 나무하던 옛길, 영세 넘는 높은산과 흰구름....
고향의 어느 하나 정겹지 않은게 없다.
땅 한뼘, 풀 한포기마다 그곳엔 내 조상의 정열이 깃든 곳이다.
누대에 걸쳐 땅은 소유자의 명의만 바뀌었을뿐 땅이 품고 있는 옛 이야기는
아직도 풀어내고 있다.
그들과 마음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고향을 찾아간다면 한달에 두세번 가는 이유가 될까?
고향!
누군가 말만 띄워도 가슴이 설레지 아니한가
육신이 멀쩡할 때 수시로 가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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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어단파파님의 댓글
어단파파 작성일
누가 그럽디다.
"그리움이 없는 곳은 더 이상 고향이 아니다"
곱씹어 보면 결국 사람 관계이며
못 잊을 추억입니다.
가끔씩 그 사람이 그립습니다.
오랜만입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에이포님의 댓글
에이포 작성일
유년의 천진함과
청년의 꿈이 함께 자란 곳 고향.
그 고향의 이야기를 전설처럼 엮으셨습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