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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와 꾀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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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와 꾀꼬리
꾀꼬리의 노래를 들어본지 오래되었다.
어린 시절에는 동구밖에서도 가끔 들을 수 있었으나 이제는 동구밖이라는 개념 조차 흐리하게 지워져 가고 있다.
그러다 보니 꾀꼬리를 소리를 듣고 싶어도 들을 수 없는 세상에 온 것이다.
반면, 까마귀는 생각보다 훨씬 더 많아진 것 같은 느낌이다.
조그만 변두리로 나가면 까마귀와 만날 수 있는 기회는 더 많아지는 것 같다.
인간이 들끓는 곳에 까마귀도 같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 조류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꾀꼬리와 까마귀는 생긴 모양은 조류로서 구조는 유사할지 모르지만 울음소리는 인간이 느끼기에 너무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꾀꼬리는 가장 아름다운 음으로 각인되어 있는 반면 까마귀는 그와 대척점에 있는 조류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음 색깔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비유하여 꾀꼬리 같다는 이야기를 하곤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음을 제공해 주는 꾀꼬리가 점점 인간의 세계에서 멀어진다는 것은 결코 소망스러운 일은 아니라 본다.
가뜩이나 소음공해에 찌든 인간의 세계에서 가끔이나마 꾀꼬리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좀 더 맑은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턴테를 생각하면 아쉬운 구석도 많다.
수 많은 새들의 울음에서 어떤 새는 호감을 받는 반면 또 어떤 새는 별로 그렇지 못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물론 인간의 감정 상 선호와 비 선호가 갈린다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현상일지 모른다.
요는 아름답게 들리는 대상의 울음은 점점 듣기 어려워지고 그렇지 않은 대상은 흔히 들을 수 있다는 게 안타깝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꾀꼬리를 앵무새처럼 새장에서 키울 수 있는 상황도 안 되다 보니 할 수 없이 꾀꼬리에 대한 동경은 더 커 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꾀꼬리 소리를 들어보지 못하고 크는 사람들은 무슨 헛소리냐고 반문 할 수 있겠지만 때묻지 않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겪어 본 사람은 그쪽을 동경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도 까마귀가 있었기에 꾀꼬리의 울음소리가 상대적으로 더 아름답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생각하기에 따라 세상에는 귀하지 않은 대상은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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