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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 문화예술

황금 1500k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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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규전 작성일 2017-02-24 09:33 댓글 0건 조회 99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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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비아는 스페인에서 4번째로 큰 도시로서 스페인의 안달루시아의 중심도시로서 콜롬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하면서 항구도시였던 이도시가 무역의 전진기지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탈리아를 가면 큰 도시마다 중심이 되는 성당이 있다. 이름하여 도우모 성당이라고 칭하는 것을 들었는데 이 세비야에서는 대 성당이 상징물로 자리매김 하고 있었다. 원래 이슬람 사원이 었었는데 밀어 내고 100여년에 걸처 이 성당을 지었다고 한다.

 

플라멩고의 본고장이 된 것은 배를 타고온 무역상들이 여기에 관심을 가지면서 급격히 발달하게 된다. 플라멩고는 집시들의 문화로서 남성들은 발끝과 뒷끔치를 탁탁 소리를 내는 등의 동작을 하며 여성들은 발놀림보다는 손과 전신의 아름다움을 춤으로 표현한다. 공연에는 복잡한 이름의 손뼉치기 손가락 튕기기 추임새가 수반되기도 하며 종종 캐츠테네츠가 등장하기도 한다. 말만 듣던 플라멩고 공연을 직접 보면서 이런 문화가 나올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조금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실제 집시와 관련되어 유럽쪽에서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호소한다고 한다고 하지만 세비아에서는 이들의 문화를 계승 발전시킴은 물론 하나의 관광상품으로도 개발하여 전 세계인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고 본다.

 

세상에는 특이한 묘도 다 있다. 바로 콜롬부스 묘이다.(두번째 사진) 콜롬부스의 태생은 이탈리아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데 그의 묘는 스페인에 있는 세비야에 안장되어 있다. 콜롬부스가 신 대륙을 발견하면서 스페인은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된다. 새로운 대륙을 발견하면서 그 대륙을 식민지로 삼아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된다. 그 관문이 바로 항구도시이 세비야인 것이다. 원래 신대륙을 발견하게 된 동기는 인도에서 나오는 검은 황금으로 일컬어지는 후추 무역을 원활하게 하기 위하여 출발하였다고 하나 실제 발견한 땅은 인도가 아니가 신대륙인 아메리카였던 것이다. 콜롬부스가 말년에 관절염을 앓으면서 스페인 왕국과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고 한다. 실제 자신이 스페인에 기여한 바가 엄청 컸다고 생각하였으나 그에 상응하는 대우를 못 받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가 죽으면서 내 무덤을 스페인의 땅에 묻지 마라.”라고 유언을 하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스페인에서는 콜롬부스가 기여한 부분을 아는지라 그의 공을 높이 치하하여 세비아 성당에 안치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유언대로 한다면 스페인 땅에 묻을 수 없었는지라 그의 유언을 잘 받들어 땅에 묻지 않고 당시 네 명의 왕이 받드는 공중의 관 위에 안장을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콜롬부스관을 메고 있는 네 명의 왕 중 앞에 두 왕은 당당 뒤에 들고 있는 반면 두 명의 뒤에 왕은 머쓱한게 얼굴을 푹 떨구고 있는 모습인데 이유인즉 앞에 두 왕은 콜롬부스에서 대해서 우호적이었단 왕이고 뒤에 두 왕은 배척을 한 왕이었다고 한다. 우리가 그까지 알 필요는 없지만 흥미는 느낄 수 있는 대목이라 소개한다.

 

세비아 대성당 주제단은 성모마리아의 품에 안긴 마리아상을 중심으로 1,500kg의 금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이렇게 많은 금으로 장식하게 된 이유는 콜롬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하면서 그 대륙에 있었던 금이란 금은 모조리 공출을 받아서 여기에다 금 조각을 만들어 안치해 놓았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이렇게 많은 금이 있는 곳이 있었다면 옛날 원나라나 왜놈이나 청나라, 명나라에서 가만히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의 고유한 문화유산도 스스로 지킬 힘이 없으면 아무런 가치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 본다. 이 금의 출처는 신대륙이라 했다. 그 많은 금을 돈을 주고 사 왔을리 만무하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상상이 가능하리라 본다. 옛날 우리가 왜놈이나 뙤놈들에게 당한 약자의 입장에서 보면 간단히 풀릴 문제이다. 그렇다면 세비야 대성당에 있는 금을 돈으로 환산한다면 얼마의 가치가 있을 것인가에 대하여 독자 여러분들이 계산해 보기 바란다. 참고로 금 한 돈은 3.75그램이다.

 

세비아 대성당은 중정은 이슬람식의 정원으로 꾸며져 있다. 스페인이 이슬람의 세계에서 700여년 공존을 했다고 언급되었다. 이렇게 장시간 그들의 문화권에 있다보니 가는 곳 마다 이슬람의 숨결을 엿볼 수 있었다. 세비야성당에서 이슬람 문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중정의 오렌지 나무와 바닥의 장식일 것이다. 바닥은 수로를 연결하고 그 수로 곳곳에 물이 솟구치는 장식된 대형 용기를 설치하여 더운 여름날에 온도를 낮추는 방식의 기법을 도입하고 있었다.

 

하랄다의 탑은 세비야를 상징한다는 대 성당의 부속건물로 바람개비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건물내부에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방법으로는 일반적으로 계단처리를 하는 것이 일반적일 것이다. 그런데 이 성당은 계단이 아닌 삿갓으로 처리하여 오르락내리락 하는데 상당히 편리하게 처리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코너의 숫자를 표기한 바 36개 정도로 구불어져 있는데 워낙 높아서 오르기도 쉽지는 않았다. 한 여름 온도가 40여도까지 높아진다고 하니 이때 이 경사지를 오른다면 진이 좀 빠지리라는 생각도 해 본다. 그렇다면 왜 계단을 만들지 않고 이런 방식으로 처리했을까? 당시 왕이나 귀족들이 전망대 끝 까지 가는데 너무 힘들다고 판단하여 나귀를 타고 갈 수 있도록 설계 하였다고 한다. 충분히 이해를 하고 남을 일 같았다. 덕분에 후세 일반 관광객들이 이용하는데도 좀 수월한 것 같아 고마운 마음마저 든다. 실제로 안내하던 가이드가 오르기 전에 이런 이야기를 먼저 했기에 가는 과정에서도 마치 옛날 귀족이라도 된 듯한 느낌을 조금은 받았다. 단 나귀를 타지 않아서 감동이 아주 진하지는 않았지만 경사도에서 계단이 없는 곳으로 간다는 것 만으로도 특이한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힘들게 전망대 망루에 올라간 순간 세비아의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올라오는데 다리 아프고 지루했던 느낌을 한 방에 불식시킬 수 있는 명장면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비야 스페인광장은 최근에 지어진 건축물이지만 유럽 고대의 건축물처럼 느껴질 정도로 대단하였다. 저녁무렵에 방문한 세비아 스페인광장은 그 크기나 위용이 타에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대단하였다. 입장을 하여 본 광장과 그 주변의 건물, 그리고 아름다운 다리 등을 보는 순간 또 하나의 새로운 세계로 들어온 느낌이었다. 바닥은 이슬람풍의 작고 반질반질 한 조약돌로 아름다운 문양을 넣어서 깔아서 보고 밟고 다니는 이들의 새로운 감정을 불러 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건물과 광장 사이에는 운하로 처리하여 더운날에 열기를 식혀줌은 물론 조경의 가치마져 겯들여 지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우리가 갔을 때에는 겨울철이라 물은 모두 빼 놓았기에 물이 찬 운하의 모습은 상상으로만 맛 보고 왔다. 중앙에 분수에서는 하얀 물줄기가 볼륨감을 갖고 솟아오르면서 보는 사람들에게 시원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이 스페인 광장은 옛날 시설물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잡아두는 명소로 자리매김 했다고 한다. 내력은 1929년 라틴아메리카 박람회장으로 조성되었으며 당시 본부 건물로 지어졌으며 바로크 양식과 신고전주의 양식이 혼합되어 설계되어 졌다고 한다. 중정이나 회랑 그리고 아치형 다리는 이슬람의 문화가 고스란히 반영된 건축물이었다. 회랑의 벽면에는 타일로 아름답게 조각된 역사적 에피소드를 바탕으로 한 예술작품들이 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잡았으며 그 작품과 함께 호흡할 수 있도록 벤치까지 만들어져 있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앞에 펼쳐진 공원은 시간이 없어서 걸어 보지도 못하고 발걸음을 돌리고 말았는데 아쉬움이 컸다. 단 석양이 공원 중심부를 향하여 전개되었던 모습이 아직까지 뇌리에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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