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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초희(楚姬) - ‘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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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에이포 작성일 2024-08-25 08:52 댓글 0건 조회 33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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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초상.jpg

 

초희를 말하면서 어찌 허균을 빼놓을 것인가. 허물없는 남매이기도 하지만 초희의 문학을 논함에 있어 실과 바늘처럼 떼려야 떼놓을 수 없는 인물이 허균이다.

 

교산(蛟山), 허균(許筠, 1569~1618)의 호다. 기술한바 교산은 허균이 태어나고 철없이 어린 시절 뛰어놀던 사천 외가의 뒷산 이름이다. 허균은 허엽이 강릉 세력가이자 조선 전기 예조참판을 지낸 김광철의 딸과 재혼을 한 뒤 그의 나이 53세의 나이에 얻은 늦둥이로 누나 초희와는 여섯 살 차이가 난다. 초희에게는 그럴 수 없이 소중한 동생이었을 것이다.

 

그가 조선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의 저자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는 생전에 '조선에서 글로서 허균을 따를 자가 없다'는 소리가 나올 만큼 당대의 문장가로 시문을 비롯해 비평 등 많은 저술을 남기기도 했다.

 

그는 문장가로서의 명성뿐만 아니라 시대를 앞서가는 저항적 사상과 파격적이고 자유분방한 행보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니 이단아이자 풍운아라는 소리를 들을 만했다. 사학자들은 균은 시대를 잘못 태어난 이상주의자며 비운의 천재라고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균은 9세에 능히 시를 지었는데, <어우야담>을 쓴 유몽인은 균은 어릴 적부터 그의 기억력은 비상했고, 10세 이전의 소년기에도 글을 잘 지어서 주변을 놀라게 했다. 이 아이는 나중에 마땅히 문장 하는 선비가 될 것이다라고 전하고 있다.

 

한편으로 균이 성장하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보던 추연(秋淵)은 그가 쓴 글들을 읽고 후일 뛰어난 선비가 되어 허씨 문중을 빛내겠지만 허씨 문중을 뒤집어엎을 자도 이 아이일 것이다.”라는 소름 돋는 예견을 한다. 이미 기술했듯이 허균 자신도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解命文/운명풀이 글>에서 이런 사실을 인정한다.

 

나는 기사년(己巳年·1569, 선조 2) 병자월(丙子月·11) 임신일(壬申日·3) 계묘시(癸卯時)에 태어났다. 성명가(星命家·사주, 관상가)가 이를 보고 신금(申金)이 명목(命木)을 해()치고 신수(身數)가 또 비었으니 액()이 많고 가난하고 병이 잦고 꾀하는 여러 일이 이루어지지 않겠다. 그러나 자수(子水)가 중간에 있는 고()로 수명이 짧지 않겠고 강수가 맑고 깨끗하여 재주가 대단하겠고 묘금(卯金)이 또 울리므로 이름이 천하 후세에 전하리라라고 말했다. 나는 그전부터 이 말을 의심해왔으나 벼슬길에 나온 지 17년에서 18년 이래 전패(顚沛)와 총욕(寵辱)이 반복되는 갖가지 양상이 은연중(隱然中) 그 말과 부합되고 보니 이상하기도 하다.”

 

균은 스스로를 총명하고 자신감이 넘쳤으며 과시하기를 좋아했다고 그의 저서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에서 토로한다. "밸이 커지고 간이 부어서 하루에도 수만 마디를 외우느라고 입술을 쉴 새 없이 나불거렸다. 사람들이 나더러 뛰어나게 똑똑하다가 칭찬했고 나 또한 그것을 과시했다"고 회상한 것만 보아도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짐작하게 한다. 어렸을 때는 몰랐겠지만 그에게는 서얼이라는 깊은 아픔을 안고 살았으니 일면 그의 저항적이거나 이단적인 성향이 이해되는 측면도 있다.

 

여기서 의문점은 균이 태어난 강릉에서 생활한 기간이다. 허균의 아버지 허엽은 삼척부사라는 짧은 관직 생활을 파직으로 불명예스럽게 마치고 강릉에 머물다가 그해 8월 한성으로 올라가게 된다. 학자들은 이때 강릉김씨와의 사이에 태어난 봉 · 초희 · 균을 데리고 올라간 것으로 적고 있다. 하지만 허균이 쓴 각종 글들을 살펴보면 어린 시절을 강릉에서 보낸 흔적들이 곳곳에 나타나고 있어 의문점을 남긴다. 통상 2시간여 거리인 지금과 달리 조선 전기에 강릉과 한성은 600여 리 길로 보통의 성인이 걸어서 가면 십여일이 소요된다. 말이나 나귀를 이용했다 하더라도 일주일이 넘게 소요되는 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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