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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 문화예술
하고싶은 소박한 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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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내리면,
내린대로 송이송이 소복이 쌓여만 가는 마을
조용하다 못해 숨소리 조차 큰 소리로 들려오는 마을.
인가라고는 산모랭이를 돌아서도 한참을 더 지나야 나타나는
그런 마을의 외딴집에서 하룻밤 묵었다 오고싶다.
폭설로 오도가도 못하는 그런 날을 택해서.
방안에 짐을 풀곤 톱을 빌려 뒷산에 올라 가야겠다.
지난 밤 폭설을 맞은 뒷산 소나무는 가지를 늘어 뜨려 언제 주저앉을지 모른다.
생송아리가 산에 지천이다
생송아리는 시퍼런 소나무 가지를 말하지만
우리네가 말하는 생송아리는
한겨울 폭설을 맞아 견디지 못하다가
제 가지를 꺽어 놓고야 마는 바로 그 눈맞은 소나무 가지를 말한다.
폭설이 내린 날 산에 가면 가지가 뚝뚝 뿌러져 땅에 나뒹구는 생송아리가 지천이었다
톱만 들고 가서 가지를 잘라 끌고 오기만 하면 된다
뒷산에 올라 서너번만 끌고 오면 하룻밤은 후끈하게 보낼 수 있다.
정지칸 아궁이 앞에서
미처 녹지못한 소나무 잔가지를 꺽어 수북이 쌓아놓고
소나무갈비로 불을 피운다. 한소쿠리로는 어림도 없다.
두 소쿠리, 세 소쿠리 연달아 갈비를 집어넣고 열기를 올리다가
생송아리 잔가지부터 밀어 넣는다.
소나무 관솔에 불이 붙기 시작하면 화력은 걷잡을수 없이 쎄 진다.
짚삼테미를 깔고 앉아 생송아리 타는 향내를 지긋이 맡아야겠다.
마른 장작에서 나는 향과는 달리
눈에 젖었다 마르며 타는 생송아리는 그 느낌부터 다르다.
쌉싸르 하면서도 코를 톡 쏘는 향은
마치 한의원에 들어서는 순간 풍겨오는 감초내처럼 사람을 유혹한다.
한동안 아궁이 앞에서 열을 받아가며 소나무향에 취하다 보면
갑자기 무얼 먹고 싶겠지.
청국장을 달래서 먹어야겠다.
시골집에 청국장은 언제나 있으니 염려 안해도 된다.
장날에 비닐봉지에 넣어 파는 가루 청국장이 아닌
숟가락으로 뜨면 끈이 끈끈하게 달라붙고
콩자반 그대로인 청국장이 있을 것이다.
큰사발 가득이 뜬 청국장에다 식은밥 한덩이 말아
눈맞은 생송아리가 훨훨타는 부뚜막에 앉아서 한번 먹어 봐야겠다.
콤콤한 청국장이 그렇게도 먹고싶은지 모르겠다.
배부르고 등 따시면 잠이 오기 마련.
비몽사몽간에 옛사람이 등장한다.
할머니 고운 웃음이 보일 것이다
엄마가 혹독하게 나무라는 모습도 보일것이고.....
“언년아 ~ 뒷목가 화댕이(소이름) 끌고 온나” 할머니 음성도 들리고
“저러이 마한느무 종개가....” 부아가 치밀어 내쏘는 엄마의 음성도 들릴 것이다.
어린시절로 돌아가는 행운이 그곳에 있을 것이다.
하루저녁 하룻밤에 세상 더없는 여유를 부려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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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어단파파님의 댓글
어단파파 작성일
1960~70년대까지만 해도 산촌마을 어디든 있었을법한 풍경,
그 시절 살았던 사람들,
눈만 감으면 금세 떠오르는 그림입니다.
솔 송아리, 짙은 굴뚝 연기, 청국장 냄새, 할머니, 어머니의 목소리까지,
잔잔하고 담백한 표현으로 참 따뜻한
추억여행을 할 수 있게 하는군요. ^*^
공병호님의 댓글
공병호 작성일
꿈에서라도 만나보고싶은 할머니 어머니 어린시절로 돌아가야 만날 것같습니다
어머니께 야단을 들으면 들을 수록 잠은 더욱 깊어지겠지요.
비내리는 겨울밤 ㅑㅇ수에 젖어봅니다.
김윤기님의 댓글
김윤기 작성일
아들 밖에 없었는 우리 집
우리 집 저녁밥보다 00댁 저녁 제사밥을 먹는게 빠르다고 했었지
마을 가득 피어오르던 저녁연기가 그친지 오랜데 밭에 나가신 엄마는 언제쯤 오실지
빈 솥에 물만 붓고 군불부터 피우던 형님 곁에 앉아 부지깨로 불장남 치던 그때가 그립습니다.
에이포님의 댓글
에이포 작성일
봄눈 내리던 밤 뒷산 설해목 지던 소리가 밤새 울리던 시골집.
생송아리을 아궁이에 넣으면 정지 하나가득 퍼지던 매캐한 연기와 그 알 수 없는 카타르시스,
저녁 무렵이면 집집의 굴뚝 마다 연기가 피던 고향마을의 풍경을 되살려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