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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하동을 다녀오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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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하동을 다녀오다. 3
정확하지는 않지만 500km 이상 운전을 해 온 것 같았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점심 먹을 때와 휴게소에 들를 때 잠깐 쉰 것 이외에 줄기차게 달려왔다.
그 사이에 차에 휘발유도 한 번 보충해 주었다.
다리가 둘둘 떨릴 정도로 운전한지라 더 이상 할 수 없을 것 같았는데 막상 목적지에 오니까 새로운
힘이 난다.
맨 먼저 달려간 곳은 우리 강원도 원주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박경리 소설의 배경이 되었던 평사리
최참판댁이었다.
하동 읍내에서 산수유가 유명한 구례 쪽으로 한 10여 분 정도 강줄기를 따라 올라가다가 오른쪽
편에 있다.
지리산 자락에 이렇게 넓은 평원이 있다는 것도 특이한 현상이 아닐 수 없었다.
토지의 배경이 된 지역인 만큼 누가 봐도 좋은 글이 나올 수 있을 정도로 산세가 아름답고 웅장하면서
기품이 흘러내린다.
최참판댁은 그 드넓은 평원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바로 옆에 토지문학관이 나란히 있으므로 연계하여 관람할 수 있도록 배치해 놓았다.
주변에는 드라마 촬영을 하기 위하여 옛날 초가삼간 세트를 만들어 놓았는데 관리를 잘하여 사람이
들어가 살아도 될 정도로 깨끗하게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그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장면은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같이 아름다우면서 한국적 농촌의 정취가
그대로 묻어남을 느낄 수 있었다.
그 평원 너머에 섬진강이 흐르면서 확 트인 경관은 누가 본다고 하여도 가슴이 뚫릴 정도로 대단한 장면을
연출시키고 있었다.
풍부한 물을 바탕으로 논농사가 잘 되었음으로 당시 최참판의 위세는 대단하였으리라 상상이 된다.
드넓은 평원 중심부에 부부송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도 아주 인상적이다.
논 중앙부에 저렇게 큰 소나무가 쌍을 이루고 서 있는 장면은 먼발치에서 보아도 대단한 느낌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 같다.
시간이 나면 그 곁에 가 보고 싶지만 먼발치에서 보는 것 만으로도 만족감을 충분히 가질 수 있었다.
토지 문학관으로 들어가 보자.
거기에는 박경리 작가가 썼던 육필 원고에서 시작하여 재봉틀 등 가사에서 쓰던 일상의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우리네 과거의 삶에 흔적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당시에 이 작가가 써서 기고했던 잡지도 전시되어 있었고, 토지의 단행본도 전시되어 많은 사람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였다.
세월은 흘렀지만, 작가가 쓴 토지의 세상은 생생하게 살아서 현장에서 환생한 듯 한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어서 바로 옆에 있는 최참판댁으로 갔다.
고택의 맛이 물씬 풍겼지만, 이 건물은 과거부터 있었던 게 아니라 소설 속에 나온 최참판댁을 근대에 와서
새롭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어차피 토지란 소설에서 나온 최참판댁이 처음부터 있었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박경리 작가가 토지를 쓰면서 여기에 와 본 적도 별로 없었다는 후문도 있다.
어찌하였건 최참판댁은 누가 봐도 명당자리처럼 보인다.
집 아래 펼쳐진 농토가 다 그 참판댁의 것이라 했을 땐 지금으로 말하면 갑부의 반열에 오를 정도였을 것이다.
실제로 옛날에 갑부는 기름진 농토를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가 그 척도에 들어갔음으로 소설 속이나
당시에 현실 속에서도 많은 토지를 가진 지주였을 가능성은 크다고 본다.
그래도 만들어진 지 한참 되어 고택으로서 손색이 없을 정도로 세월의 때도 적당히 묻어 있었다.
“이리 오너라”를 외치면 참판댁 마당쇠가 나와서 영접할 정도로 운치 있고 그럴싸한 고택 건물로 자리
매김하고 있었다.
우리가 갔을 땐 산수유와 매화가 만발하였고, 영춘화도 노란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었다.
물론 강릉지역은 매화 정도는 피었지만 산수유는 아직까지 꽃망울을 다 터트리지 않은 터이라 우리 지역보다
봄이 며칠은 더 빠르게 오는 것 같았다.
주변에 심어 놓은 동백도 일부 꽃망울이 터질 듯 부풀어 있었고 일부 성급한 꽃망울은 꽃잎을 밖으로 내
뻗치고 있었다.
봄의 향연이 막 시작되는 시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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