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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앨범을 도록책으로 편찬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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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임욱빈 작성일 2020-06-13 14:46 댓글 0건 조회 1,01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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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수십년을 살다보면 앨범이 몇권에서 열권이상 되는 경우도 있다고 봅니다.

자식들도 관리하기 어려울 것이고 하여 나는 우리부부의 10권이상 되는 앨범 사진을 각종 미술대전에서 발간하는 도록처럼 사진뿐만 아니라 졸업장 같은 각종 문서, 심지어 기념패 등도 사진을 찍어 도록화하여 4-500페이지 한권으로 만들어 책꼿이에 남기려고 합니다. 자식들도 순차 만들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도록 제목은 가칭 부부의 삶과 인연, 0대손 임욱빈,00’ 그리고 많은 앨범과 사진들은 버리기로 했습니다. 단순히 사진만 올리는 것이 아니라 글을 써서 나의 뿌리, 자식들에게, 후손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도 넣었습니다. 소생은 글로 쓰는 부분은 100페이지 정도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에 대한 기록부분에 넣어야할 부모님의 사진은 대부분 없어졌더군요. 심지어 나의 초, , 고 졸업장 등도 없어졌습니다. 남은 자료만이라도 기록해 두기로 했습니다. 도록 10권 정도 발간하여 남긴다면 원본을 잃어버려도 도록에 사진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많은 시간이 지나도 기억할 수 있다고 봅니다. 아마 동문님 중에는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분이 있지 않을까 싶어 공유하고자 올려 봅니다.

 

도록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해 봅니다.

10장 배우자와 자식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

2. 자식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 중

. 내 아버지 자리에 내가 섰다.

너희들에게는 할아버지이신 나의 아버지께서는 올곧은 선비의 기풍을 지니셨다. 공직자로서의 품행이 몸에 배었고, 성품이 올곧다 보니 친척이 없는 마을에 살아도 동네분들은 아버지를 온전한 농부로 대하지는 않은 것 같다.

 

동네 분들은 아버지를 찾아와 애로사항을 말하면 조언을 해주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역할도 해주셨다. 약한 분께는 하염없이 약하셨고, 강한 분한테는 올곧고 바른 말씀을 서슴치 않으신 분으로 기억한다.

 

공직에 더 계셨으면 어머님도 고생 덜 하셨을 것이고, 우리 형제 자매도 많이 다른 모습으로 성장하지 않았겠나 생각해 본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공부를 강요하지 않으셨다.

스스로 알아서 하라신다.


그래도 고등학교는 강릉시내에 있는 학교로 보내 주셨다.

농촌에서 강릉시내 학교로 간다는 것은 재정적으로 큰 부담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하숙을 못하고 자취생활을 하였다

.

내가 법원직 시험에 합격하여 첫 발령을 받았을 때 그렇게 좋아 하셨던 아버지!

 

아버지께서 邑面사무소 호병계장으로 계셨다면 분명 호적사무 감독기관인 법원에 매달 한 번씩 오셨을 것이다.

 

내가 원주법원 호적계에 몇 개월 근무한 적이 있었는데 읍면 호병계장은 매우 겸손하게 법원에서 호적사무를 보고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그 옛날 아버지의 모습을 많이 상상해 보았다.

이하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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