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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초희(楚姬) - '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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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3년 어느 날 초희가 탄생했다.
여러 문헌을 찾아봤지만, 그녀의 사주(생년,월,일,시)중 생년 외에는 아쉽게도 기록을 발견할 수 없다. 더구나 있을법한 태몽이야기 같은 것도 전해져 내려오지 않는다. 문헌에 따라서는 탄생지가 현재 초당동에 소재한 ‘허난설헌 허균의 기념공원’ 안에 소재한 ‘許氏家’라고도 하고 그녀의 외가인 '사천 애일당 터' 라고도 되어있어 혼란스럽다. 허균이 쓴 학산초담에도 형 봉과 누나 초희의 탄생지가 강릉의 옛 지명인 임영(臨瀛)이라고 밝혔을 뿐 상세한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김광철은 기술한바, 대문장가 허엽(許曄)의 장인이자 허균(許筠)과 허난설헌(許蘭雪軒)의 외조부다. 그런데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남존여비 사상이 깊었던 시대이고 명나라의 영향을 받아 풍수지리를 신봉하던 때라 친자를 얻기 전에는 외손이라도 자신의 집에서 잉태시키지 않으려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애일당의 뒷산은 이무기가 누워 있는 모습이기에 교산(蛟山)이라 불렸으며 그 지맥이 사천 앞바다까지 이어져 있는 명당이라 이 명당의 정기가 외손이 아니라 친손에게 미치기를 원했을 것이 자명하다.
그러나 당시는 ‘시집을 가는 시대’가 아니라 ‘장가를 드는 시대’였다. 즉 , 혼사가 이루어지면 신부가 시댁에서 시부모를 봉양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신랑이 처가에 입주하여 일정한 기간 기거를 하다가 자손을 생산하거나 자립할 능력이 생기면 처가 인근에 분가를 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런 사유로 김광철의 출가한 첫째 딸이 애일당 터에서 신혼생활을 하던 중 허봉(許篈)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설득력이 있다.
황재군(黃在君)이 지은 ‘한국고전여류시연구’ 에는 “허경번은 조선명종 18년 호 초당, 본관 양천인 허엽과 강릉 김씨 슬하에서 강릉 초당리 외조부댁애서 태어나니 신사임당과 함께 강릉의 두 여류이다.”라고 기술되어 있는데, 외조부의 집은 초당이 아니라 사천인바 이는 강릉의 지리에 익숙치 않은 저자의 오류일 가능성이 크다. 또는 초당의 집은 허엽의 집이 아니라 허엽의 장인인 김광철의 별장이거나 허엽을 위해 김광철이 마련해 준 집일 가능성이다. 이 경우 강릉 초당리 외조부 댁이라는 황재군 작가의 표현이 맞을 것이다.
전 강릉대 교수 장정룡 교수가 지은 ‘허난설헌 평전’에는 “허부인 난설헌은 강릉 사천 애일당 외조부 댁에서 태어난 이후 초당에서 아버지 허엽과 함께 살았는데...’ 라고 기술되어 있는데 오빠 허봉의 출생 사례를 볼 때 일반적으로 알고 있듯이 초희는 초당 본가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오빠 봉처럼 외조부의 애일당 터에서 잉태되고 출산을 했을 가능성을 말하고자 함이다.
오랫동안 내려 온 구전과 구색 맞추기를 위해 초당 허씨가를 초희의 생가터로 무리해 합리화할 필요는 없다. 동시에 사천면 애일당 터에서 태어났다면 그 역시 애써 부인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우리가 바라는 바는 왜곡됨이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대문장가문인 친가의 핏줄을 이어받았든 태백준령을 중심으로 몇 안되는 명당의 기운을 받아서든 초희는 태어나면서 부터 신동이라 부를 만큼 총명했다. 본가인 초당과 사천은 거리로 10여리 안팎이다. 귀한 여식이고 영민하기만 한 손녀였으니 가족들의 귀여움도 독차지했을 것이며, 미루어 짐작해 볼 때 초희는 아마도 자신이 태어난 사천 외가와 초당의 본가를 자주 오가며 어린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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