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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길묻 - 불멸의 사랑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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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은 우리에게 기원(祈願)의 대상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합장을 한 채 탑에 경배를 하고 소원을 빌며 탑을 도는 탑돌이를 하기도 한다.
부용의 어디에서 이런 아이디어가 나왔는지 모르겠다. 너무도 간절했던 마음에서 비롯됐던 것일까? 문자 한자 한자로 탑을 쌓듯 시를 지었으니 말이다. 탑은 원래 성토를 하고 바닥을 다진 다음 기단을 쌓고 그 위에 돌이나 금속으로 삼각형의 구조물 형태로 쌓아 올라가는 것이다. 하지만 부용의 탑은 거꾸로 내려오면서 쌓았다. 하나의 문자로 시작하여 한자씩 덧붙이며 아래로 탑을 쌓아갔다. 인류 역사를 통해서도 그 유래가 없는 형태의 탑시(塔詩)가 탄생한 것이다.
온 정성을 다해 탑시를 지은 다음 하인을 시켜 서울로 보내놓고도 그 기다림은 길었다. 그리고 또 얼마를 기다렸을까. 마침내 대감은 서울에서 사람과 함께 노새 한 필을 보내왔다. 일각이 멀다는 생각으로 짐을 챙기고 떠나려는데 신임 평양감사로 부터 서신 하나가 전해졌다.
서신을 펼쳐보니 늘 마음으로 흠모를 하면서도 명망있는 조정 대감의 소실이라 감히 범접을 못하고 멀찍이서 부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신임 평양감사가 부용이 서울로 떠남이 얼마나 아쉬웠던가 안타까운 심경을 시로 지어 보낸 것이다.
魂逐行人去 나의 혼은 떠나는 그대를 쫓아가고
身空獨依門 빈 껍데기가 된 몸만 문간에 기대어 섰네.
혼은 부용을 쫓아가고 빈 육신만 남아 있노라고 자신의 안타까운 마음을 적은 것이다. 신관사또의 시를 접한 부용은 또 한 이런 시를 감사에게 던지듯 남기고 그토록 그리운 님이 있는 서울로 가는 걸음을 재촉한다.
驢遲疑我重 나귀걸음 더디기에 내 몸이 무거워서인가 했더니
添載一人魂 혼 하나를 더 싣고 있어서 그런가 보오.
‘혼 하나를 더 싣고 있어서’ 라니 혼이 어찌 무게가 있을까만 이 얼마나 무릎을 ‘탁’ 치고 감탄해 마지않을 절묘한 싯구인가.
고삐를 잡은 하인이 노새에게 채찍질을 하건만 대감에게 가는 길은 마음 같지 않게 더뎠다. 여러 날 만에 서울에 다다르고 보니 노새는 대감의 본가가 있는 북촌을 그대로 지나쳐서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남산 기슭의 한 초당으로 향했다. 당도하고 보니 새롭게 단장한 아담한 별장이었다.
‘녹천정(綠川亭)’, 솔숲에 둘러싸인 한강이 바라다보이는 정자라는 의미의 현판까지 걸려 있어 부용을 맞는 김대감의 따뜻한 배려가 짙게 묻어나는 정인(情人)만을 위한 보금자리였다.
당시 호조판서였던 대감의 정실이 생존해 있었는지 상세한 기록을 찾지는 못했다. 그러나 당시 행세깨나 한다는 조정의 관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암암리에 소실이나 정인을 두는 것이 사회적 지위를 상징하던 시절이라 부용은 김판서대감의 소실이 되어 주위 사람들로부터 ‘초당마마’로 불렸다.
그러는 사이 세월은 흐르고 대감의 나이는 80을 넘어섰다. 그제야 임금 순조는 그를 관직에서 놓아주고 오랫동안 나라를 위해 일한 공을 기려 그에게 봉조하(奉朝賀)라는 명예 관직을 내리고 일선에서 물러나게 했다. 일종의 고문과 같은 조정의 원로가 된 대감은 친구들을 녹천정으로 불러 시를 읊고 부용의 춤사위와 거문고를 즐기며 유유자적한 나날을 보냈다.
흐르는 세월 속에 어느덧 대감의 나이도 85세가 되었건만 부용은 한창 익어가는 스물일곱, 시와 춤 기악 등 풍류로 만족하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청춘이다. 다행히 대감과 부용을 찾아 녹천당을 방문하는 시인 묵객들을 접대하느라 한쪽이 텅빈 몸과 마음을 달래며 보내던 차, 김이양 대감은 92세를 일기로 세상을 등진다. 지금의 기준으로 셈하면 백수를 훨씬 넘긴 나이다. 이때 부용의 나이 여인으로 한창 농익어가던 서른넷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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