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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된 무기력증(우리도 여기에 속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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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규전 작성일 2020-09-04 09:06 댓글 0건 조회 95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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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습된 무기력증


뜨거운 냄비에 한 번 오지게 딘 사람은 냄비만 보아도 겁이 날 것이다.
거북이 보고 놀란 가슴 솥두껑보고 놀란다는 이야기도 있다.

냄비나 거북이에 대한 아름답지 못한 추억으로 인하여 부정적 이미지와 위축된 축억이 크게 부각된 것이다.

뜨거운 냄비에 디었다거나 난생 처음 거북을 보고 크게 놀랐다는 것은 실제적 경험을 한 것이다.

이것을 교육적으로 돌려본다면 학습이 된 것이다.

모든 학습의 결과는 우리의 일상생활과 밀접하게 연관을 지으면서 삶의 각 부분에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

 

실패만 계속 맛 본 사람은 성공하기 힘든 구렁텅이로 빠지게 된다.

실패가 거듭되면서 학습화 되었고 그것이 고착된 셈이다.

이런 사람들은 뭣을 해도 실패할 확률이 높아지게 된다.

이유는 실패만 해 봤기에 성공쪽으로 가는데 장애를 유발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부류에 속한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도 조심스럽게 퍼즐을 맞추어보면 얼추 답은 나오리라 본다.

 

조선 초 세조때 병조판서를 했던 남이장군을 떠올려보자.

젊은 날에 성공의 아이콘이었을 것이다.

27세 나이에 병조판서에 올랐을 정도이니까 얼마나 빠르게 성공의 길만 찾아갔는지 알 만 한 일일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남이장군 같은 경우는 젊음의 기개가 넘쳐흘렀다고 본다.

해서 그가 지은 북정가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남이장군이 실패의 경험이 많다면 과연 그런 시귀가 나올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남이장군의 북정가와 비슷한 이야기로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라는 문구가 있다.

, 늑대나 여우와 같은 동물의 상위 포식자는 호랑이다.

이런 동물들은 호랑이가 얼마나 무서운 동물인지 다 알고 있기에 늘 두려움에 쌓여 살아간다고 본다.

헌데 하룻강아지는 범 따위가 무서운지 아닌지 알 방법이 없기에 호랑이 알기를 우습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호랑이가 무섭다는 것이 학습되지 않아서 발생되는 현상이라 본다.

결국 학습이 안 되었기에 비록 강아지지만 기개가 살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무수한 학습을 하고 있다고 본다.

어떤 학습을 어디서 누구하고 어떤 방식으로 하느냐에 따라 내면화 되는 것은 상이하다고 본다.

실험상에 보면 점프를 잘 하는 벼룩의 경우 자신의 키에 100배 정도를 할 수 있다고 한다.

자연상태에서 자연스럽게 학습한 덕분에 그 정도로 뛰는데 이를 억제하는 실험을 해 보면 재미있는 현상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상자에 벼룩을 집어넣고 뛰는 위 공간에 유리 같은 것을 덮어 두면 뛰다가 천정에 부딪히는 일이 발생될 것이다.

뛸 때 마다 천정에 부딪히고 나면 그 이후에는 점프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자기 주특기가 천정으로 인하여 무기력화 된 것이다.

 

우리 인간은 어떤가.

능력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은 그런 경험과 학습이 풍부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배운다는 것은 바로 경험과 학습을 체계화시켜 언제 어느 곳에 갖다 놓아도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과정이라 본다.

이렇게 좋은 것을 가르쳐 주는 공간에서 제대로 배운다면 천부적인 능력까지 끄집어내서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다 줄 것이다.

 

학교에서는 좋은 것을 많이 가르쳐줬지만 사회에서 제약은 또 사람의 능력을 움츠러들게 만든다.

비싼 비용을 들여서 대학까지 나왔는데 취업할 곳이 없다고 생각해 보자.

그 동안 들어간 비용에다가 우수한 인재가 실업자가 됨으로 발생되는 보이지 않은 비용까지 합친다면 손실이 어마어마할 것이다.

이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취업이 어렵다는 게 학습이 되고 있다.

이 학습의 결과가 본인들뿐만 아니라 주변까지 확대 재생산되는 모양새다.

그래서 출현된 현상이 공무원으로 가자는 것으로 귀착되고 있다.

 

한국에 인재들이 죄다 공무원이 되겠다고 줄을 서고 있다.

머리가 좋은 사람은 머리를 굴려서 밥 먹는 곳에 가야 제 능력을 발휘하는데 현 사회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물론 공무원도 머리를 굴려야겠지만 창의성까지 발휘하는 직업은 아닌 것 같다.

인재를 적재적소에 써야 사회와 국가가 발전할 것이다.

대업을 이룩해야 할 사람을 그냥 빗자루 질이나 하는 곳에 써 먹는다면 이 또한 불합리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 뿐만 아니다.

우리는 학습을 통해서 의기가 꺾이고 능력이 쇠퇴하는 일들을 무수히 겪고 있는 것이다.

젊은 날에는 팔팔하고 써 먹을 데가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 날 만나보면 보통사람과 같은 위치에 걸쳐 있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오고 있다.

벼룩이 점프를 하는데 천정에 방해요소를 걸쳐 놓음으로서 고유한 능력이 쇠퇴하는 것처럼 우리는 배움이나 경험을 통하여 현실에 안주하는 쪽으로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인가는 본인의 선택이라 본다.

현실안주인가 아니면 새로운 세상으로 날아갈 것인가.

물론 이 두 가지 길에는 장단점이 있게 마련이다.

적게 먹고 가는 똥 싸기 식의 삶을 사는 게 편하다고 학습되었다면 그 길로 가면 될 것이다.

아니면 이 세상에 태어나 남이장군처럼 한 번 기개를 펼치고 갈 것인가에 대해서도 본인들이 판단하면 될 것이다.

이런 판단은 결국 어떤 학습을 받았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학습을 받고도 무기력해 진다는 것은 학습 자체에 뭔가 문제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더 들어간다.

어떤 일에 을살(쇼크)을 한 번 받고 나면 그 일 근처에도 가기조차 싫어지는 게 인간의 속성이 아닐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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