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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길을 묻다 176 - 그대 길을 잃었거든...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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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에이포 작성일 2020-09-01 13:30 댓글 0건 조회 1,01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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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가을, 나는 몽골의 어느 너른 평원위에 서 있었다. 내 생의 한 가운데서 성취와 보람을 위해 땀 흘렸던 시간에서 벗어나 홀가분하면서도 막막하게만 느껴지던 시간, 순례라는 단어조차 생소했던 때에 길을 나선 것이다. 중고카메라 한 대와 간단한 옷가지를 넣은 백팩을 둘러멘 나의 모습은 영락없이 길 잃은 보헤미안이었다.

웃음기 사라진 표정과 잔뜩 무거워 보이는 어깨, 나와 닮은꼴인 낮선 이방인들에게 가끔씩 미소를 지어보였지만 그가 나를 보았을 때는 몹시도 쓸쓸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몽골에 간 김에 작은 봉사를 하기위해 새벽을 서둘러 울란바트로를 출발해 시골의 작은 초등학교가 있는 마을 바얀차강솜으로 가는 길은 가도 가도 지평선만 보이는 막막한 초원이었다. 더러 길은 있었으나 지금처럼 네비게이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손수 운전대를 잡은 가이드는 목적지를 알고나 찾아가는 것인지 의문이 들 만큼 무지막지하게 길을 개척하며 평원위로 달리고 또 달리니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가끔씩 목가로 쓰이는 게르와 생뚱맞은 곳에 세워진 폐허처럼 보이는 고색창연한 사원의 탑, 오방 천 조각을 걸어놓은 어르, 방목한 말과 소와 낙타들이 있었으나 속 시원하게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그것이 그들의 이정표인지는 모를 일이다. 살아오는 동안 줄곧 앞만 보고 달려만 왔는데 몽골에 와서도 또 앞만 보고 달리는 것이다. 가끔씩 이국적 풍경에 매료되어 풍경도 찍을 겸 쉬기도 했으나 하루 종일 까마득한 지평선만 바라보고 가는 길은 힘들고 피곤했다. 인생이 앞만 보고 달리기만 해서는 안 되는 것인 줄 새삼 느끼며 차츰 나는 마음의 안정을 찾아갔다.

그러면서 어느 책에서 보았던 글귀를 떠올렸다. 태초에 길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람이든 짐승이든 다님으로서 만들어지는 것임을, 그리고 우리가 달렸던 바퀴자국을 보고 누군가가 이어 달릴 것이다. 그러니 남은 인생길을 어떻게 갈 것인가를 생각하기보다는 뒤따라 올 어떤 이들을 위해서라도 가던 길을 우걱우걱 가야만 했다. 더구나 다시 돌아가기에는 너무도 멀리 왔다는 사실이었다.

엉덩이에 몽골반점이 있는 같은 핏줄이어서 삶의 이치도 방식도 같은 것이었을까. 가는 동안 가이드는 서툰 한국어로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를 열 번도 더 했다. 더러 길을 닮은 길도 있었으나 대부분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 우리를 인도했으며, 그나마 그 길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길은 다시 이어졌다. 마치 살아온 인생이 그랬던것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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