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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길을 묻다 176 - 그대 길을 잃었거든...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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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에이포 작성일 2020-09-19 10:30 댓글 2건 조회 1,07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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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살이 되던 해 초여름,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잡고 오일장에 따라갔다가 군 수송기가 뿌린 삐라를 보고 막연하게나마 군인들이 어떤 일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5.16 군사혁명이었다. 그 이후로 우리는 오로지 빨갱이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교육을 집중적으로 받으며 학교를 다녀야 했다.

마을마다 아이들을 모아 통학단을 만들었고, 마치 북한의 소년단처럼 일학년부터 육학년까지 행군을 하듯이 발을 맞추고 손을 높이 쳐들며 등하교를 했으며, 방과 후집으로 돌아올 때는 산골짜기를 누비며 북에서 날아온 삐라를 주웠다. 삐라는 다음날 곧장 연필과 노트와 바꿔져 그 누구랄 것 없이 가난하던 시절 부모님의 주머니 사정을 다만 얼마라도 덜어주었다.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하고, 우리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창조의 힘과 개척의 정신을 기르고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일견 시대정신이 담겨있었으나 그 헌장탄생의 이면에 숨겨진 장기집권 음모를 음모인줄도 모르고 가치와 신념으로 자리를 잡던 중학교 시절을 지나 고등학교에서 목총을 들고 교련을 하는 것으로 한 인간은 이데올로기로 세뇌되고 무장되어갔다.

자발적이 아닌 타에 의해 길들여지는 인생은 피곤하다. 민주주의라는 이름
표를 달았지만 한창 자아를 발견해 나가야 할 학생들의 상상력과 창의력에는 족쇄를 달아버린 꼴이었다. 그러면서 원함과 상관없이 산업화 물결이 밀물처럼 우리를 덮쳤다.

가진 것이 많지 않아도 순후했으며 네 것 내 것 다투지 않고 나누며 살던 시절은 가고 세상은 적자생존의 법칙이 마치 삶의 좌표처럼 판치고 온갖 부정과 부조리와 협잡과 음모와 배신이 다반사로 일어났다. 보지 말아야 하고 듣지 말아야 했던 보고 들으며 성장해야했으니 세상을 보는 사고가 온전할 리 없었다.

삶의 질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지만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쳐야 했으니 참 고단한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부모님으로부터 내려 받은 착함을 지키려면 독해졌어야 했는데 그러지도 못했으며 급속한 변화는 정체성을 생각할 틈도 주어지지 않았다. 막연하고 혼란스러운 시간들이었다.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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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일님의 댓글

365일 작성일

주옥같은 어린시절 이야기 구구절절 합니다.
그때엔 그게 진실이었고 그거 아니면 못 사는 줄 알았죠.
나이 들어 가면서라도 어떤게 진실인줄 알게 된것도 다행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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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포님의 댓글

에이포 작성일

민주주의는 그리고 자유시장경제는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임에는 틀림없지만
이념을 수단시하고 어린백성까지 세뇌시켜 집단 로봇화 해...
우리는 참 순진하게도 그것이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삶의 방식인줄 알고 순종하며 살았으니 다만 무지했던 탓. 아직도 50여년 전 그 미몽에서 헤어나지 못한 백성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