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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말엽에 사용되었던 걸쭉한 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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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규전 작성일 2020-11-20 09:48 댓글 0건 조회 98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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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말엽에 사용되었던 걸쭉한 욕



조선 말엽 순조에서 철종시대에 살았던 비운의 방랑시인 김삿갓은 우리 강원도와 깊은 인연이 있었다
.

조부모가 홍경래 난과 관련되었던 차에 그의 아버지가 홧병으로 죽자 그의 어머니와 함께 영월로 숨어 들어와 살게 되었다고 한다.

김삿갓에 대한 이야기는 구전으로 또는 실전으로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가 남긴 시들이 생명력을 잃지 않고 현재까지 많은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라 본다.

   

辱說某書堂 - 김삿갓(金炳淵)

 

書堂乃早知

房中皆尊物

生徒諸未十

先生來不謁

 

여기에 쓰여 진 한시를 그대로 읽으면 죄다 욕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그 한자 하나하나를 보면 다 좋은 말로만 쓰여져 있다.

욕설로 인식되는 한자는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한자를 엮어 놓으니 맨 욕으로 점철된 시가 되어 버린 것이다.

많은 시 중에서 아래 소개되는 것은 김삿갓이 방랑생활을 하면서 어느 서당에 들렀을 때 자신을 홀대했던 상황을 한시로 표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시의 내용으로만 보았을 때에는 당시에 서당의 상황을 연상해 볼 수 있으리라 본다.


얼추 해석해 보면
,

그 서당은 아주 생소한 곳이 아닌 작자와 면식이 있는 곳이라 짐작이 된다.

규모는 요즘의 소규모 학교처럼 배우는 아이들이 채 10명도 안 되는 소규모 서당인 것 같다.

서당의 규모는 작지만 그 안에 인테리어는 잘 되어 있는 것 같다.

특히, 그 안에 귀한 물건들이 있다고 표현했는데 지금처럼 귀한 컴퓨터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특별한 벼루나 먹, 붓 같은 것이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다음으로 재미있는 상황은 훈장의 성향에 쏠리는 것 같다.

이 싯귀에 나타난 것으로 보았을 때 훈장은 엄청 자존심도 센 것 같기도 하고, 그 지역에 유지급 정도로 보이기도 하고, 사람과 소통이 잘 안 되는 꼬장꼬장한 사람으로 보이기도 하다.

여간 사람이 와도 관심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소통도 잘 안되면서 폐쇄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으로 느껴지기 까지 한다.


    

우리의 언어생활에서 고상한 표현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표현도 엄청 많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통상적으로 욕설, 상소리, 개소리, 음담패설 같은 경우를 돼 먹지 않은 사람들이 쓰는 언어로 치부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살면서 그런 언어를 하나도 구사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본다.

학창시절에 언어생활을 떠 올려보자.

상소리가 접두사에 붙어야지만 소통이 잘 되는 언어표현으로 인식되었던 때가 있다.

지금도 학교 현장에 가 보면 볼썽사나운 상소리가 아이들 사이에 오감을 볼 수 있다.

아무리 교육이 잘 되었다하여도 그들의 언어생활까지 순화시키는 것은 한계가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욕설의 시발점은 어디가 되었는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지금처럼 사회가 복잡하지 않았던 시절에는 굳이 상소리를 하지 않아도 살아가는데 지장이 없었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위 시에서 보여주고 있다.

 

위 시가 지어진 것이 조선말엽이라 보면 그 시대에도 지금의 욕 같은 것이 사용되었다는 것이 특이하게 다가온다.

그러고 보면 욕이라는 게 어떤 특정 시대에만 있는 반짝 사용되다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 전승된다는 것도 유추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후기 조선시대에 그런 욕이 있었다는 것, 그 욕이 지금도 훌륭하게(?) 통용되고 있다는데 방점이 찍히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듣도 보지도 못했을뿐더러 기성세대가 이해하기도 힘든 욕들이 암암리에 만들어지면서 사용되어 지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욕도 하나의 언어문화인가.

우리 조상들이 썼던 욕이 죽지도 않고 살아 움직이면서 계승발전(?)이 되고 있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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