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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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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석연2 작성일 2018-07-03 12:15 댓글 2건 조회 65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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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할머니


할머니는 이름이 張月梅이다

우리는 어렸을 때 “월매할머니,월매할머니” 그리 부르면서 컸다.
할머니 이름이 뭔지도 모르던 시절에 우연찮게 인장함에서 가족들의 도장을 보게 되었고
거기서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름이 한자로 새겨진 나무도장을 발견하게 되었다.


중학교때 한창 한자를 배우게 되면서 궁금해 하던 한자를 옥편을 뒤져 찾아보곤 했었는데

할머니의 이름은 거기서 알게 되었다.
張月梅, 거기다가 본관이 인동이란것도 알게 되었다.

월매할머니. 왜 그리 불렀는지도 모른다.

그냥 할머니를 당황스럽게 해보겠다는 익살맞은 생각으로 그리 불렀던 것 같다.
그렇게 부르면 때리는 시늉만 하고 “이눔시키,핼미 이름 부르는게 어디있어?‘
그러면서 그 넉넉한 웃음을 보여주시곤 했다.


할아버지가 들으셨으면 몹시 야단쳤을것이나 지금 생각해 보니

할머니는 그런 우리가 몹시도 사랑스러웠으리라 생각해 본다.
여나무살 될 때까지 월매라고 불리우면서 컸을 할머니는
시집오고 난 후론 누구한테서도 월매라는 소리는 들어 보지 못했을것이며
누군가로 부터 이름이 불리우길 기다린지도 모른다.


정선군 회동리337번지

할머니가 태어나서 시집오기까지 성장했던 곳.
난 월매처녀가 어찌해서 금당산 골짜기에 살던 先鳳총각에게 시집을 갔는지 무척 궁금했다.

우리가 어렸을 때 보던 할머니는 인자하셨고 늘 미소짓던 모습이었다.

할머니가 며느리를 보던 즈음, 며느리 입장에선 무서운 시어머니의 얼굴만 보였겠지만
손주들 눈엔 그저 여린 할머니의 모습밖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할머니의 입장에서 거꾸로 100여년전의 한 날로 돌아가 보기로 했다.
면 사무소에 가서 제적등본을 떼 보았다.
할머니는 부모를 일찍 여의고 작은 아버지한테서 자라온걸로 기재되어 있었다.


1968년도라고 기억하고 있다.

할머니가 아직 살아계실때였는데 고향집으로 한분이 할머니를 찾아오셨다.
할머니의 친정집 조카라고 하였다.

할머니가 열여섯에 시집을 오셨으니 그 조카되는 사람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을 나이인데도

할머니에 대한 얘기를 선대로부터 들었었던지 우리들에게 소상히도 알려주었다.
그늘진 마루에 앉아 감자섞인 밥을 먹고 난 후에.


그분의 말에 의하면 동네에서 할머니는 뭇 총각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으며

멀리 정선읍내까지 소문이 파다할 정도로 예뻣다고 한다.
그 당시 촌에서 소녀시절에 찍은 사진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는 말을 들었었다.
열여섯 월매소녀의 모습이 그대로 간직된 사진을.


지금도 형님집에 가면 제일 큰 고모 사진이 있는데

그 사진이 할머니 젊은 모습과 똑 같다고 했다.
거기서 10년을 더 빼서 열여섯 월매처녀를 상상하기는 어려운게 아니었다.

그말은 허황된게 아니었다. 아버지 삼형제가 다 미남형이었다.

아버지도 그렇거니와 둘째 작은 아버지,막내 작은 아버지까지 내가 봐도 잘 생겼었다.


할머니를 찾아 정선으로 향했다.

칠십에 돌아가신 할머니를, 육십이 넘은 손자가.
월매처녀가 얼마나 예쁜지, 어떤곳에서 자랐기에 뭇사람의 사랑을 받으며 컸는지
몹시도 궁금해 배길수가 없었다.

정선이라야 이곳에선 두시간 남짓 걸리는 가까운 거리이지만

할머니를 볼수있으리라는 일념때문인지 가슴까지 두근거렸고 무척 먼거리로만 느껴졌다.

정선읍내를 지나 평창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에 가리왕산으로 들어가는 길이 오른쪽으로 있다.
고갯길을 내려서서 개울물을 따라 얼마 지나지 않으면 정선군 회동리 마을이다.

마을 앞으로 지나는 개울은 용탄천으로 그 물은 조양강에 합류되어 남한강으로 흘러들었다가

서울이 있는 한강으로 들어간다.

용탄천, 조양강, 그리고 그 물이 서울로 흘러간다는 말은 월매소녀도 알고 있지 않았을까?

시골에서만 살던 월매소녀도 서울에 한번 가보길 얼마나 기대했을까?

한껏 다녀본데가 작은 아버지를 따라 정선장날이나 봉평장날이었을 월매소녀는
좀더 큰 도시로 나가보고 싶었을 것이다.

남들처럼 공부도 하고 싶고 남들처럼 예쁜 옷도 입고 싶고
하고싶은 일이 좀 많았을까?

열여섯 꽃처럼 활짝 피어났을 월매소녀가 그리도 보고싶었던지.

할머니의 발자국을 따라 나도 따라가 보았다.

할머니는 1904년생이고 1919년 2월에 혼인한걸로 나와있다.
3.1운동 하기전에 혼인을 하였으니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
조선시대의 장희빈도 역사를 유추해서 인물을 묘사했는데
100년도 안된 실물 인물을 묘사하는게 적절치 않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정선군 회동리 337번지
교회첨탑이 그 시대에도 있었을까?
저집은 오래전에 새로 지었을거고 그 전엔 초가집이었을 그곳에서 살았을 월매소녀가
눈에 선히 다가 온다. 개울가에 코스모스가 한아름 피어있어 늘 꿈이 많던 소녀.


월매소녀가 살던 집에서 정선읍내까지는 삼십리길이다.

한나절을 걸어서 정선장에 갔다가 저녁때가 되어서야 집에 왔을 것이다.
작은 아버지를 따라 정선장에 갈때는 얼마나 신바람이 났을까?


평생 구경 못하던 화장품은 또 얼마나 사고 싶었을까?

뽀얀 얼굴에 한번만 발라봤으면 싶으셨겠지.
남들 다 다니는 학교, 나도 다녀봤으면 싶으셨겠지.
남들 다 입어보는 빨간치마저고리, 나도 입어 봤으면...


고개를 들어보니 월매소녀는 어디 숨어 안 보이고

코스모스 빨간 꽃잎이 가을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저 코스모스. 그때도 월매처녀 가슴을 울렁거리도록 하늘하늘 춤을 췄을까?


동네 노인분이 접근해 온다.

낯선 사람이 왜 왔을까 싶었던 모양이다.
마침 잘되었다 싶어 여쭤 봤다.
이곳에 장씨성을 가진 분이 살고 있는지요?
대답은 단호했다. 노인분은 올해 70인데 이동네엔 장씨성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노인분이 이곳에 죽 사셨다면 노인분이 태어나기전에

할머니 친정집은 이미 다른곳으로 이사를 가지 않았을까 하는 계산이 나온다.
張龍達.할머니 작은 아버지 성함이다.
이미 오래전에 작고하셨을 테고 증손이 우리나이하고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할머니의 흔적이 끊기는 순간이었다.


할머니 말년에 중풍으로 앓아 누워 계실 때 대소변을 한때 내가 받아 처리했었다.

어머니는 장사 나가시고 잠시 집에 와 있던 나에게 어머니는 그일을 시키셨다.
요강을 가리키는 할머니의 의중이 무엇인지 대뜸 알아차리고
할머니 허리춤을 들어 바지를 벗겨드리면
소녀처럼이나 부끄러운 듯 볼일을 보시곤 했다.


결국 그해를 넘기지 못하시고 좋은 나라로 가셨다

큰 숨을 들이쉬시곤 한숨에 조용히 숨이 멎는 순간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할머니의 고운 모습을 그때는 몰랐다.
열여섯 곱디고운 월매처녀가 뛰어 놀았을 이곳에 와서 보니
가슴이 저리도록 그리운마음 뿐이다.
정선 회동리에 살았던 인동장씨 장용달의 후손이라도 찾을수 있을까?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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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규전님의 댓글

조규전 작성일

할머니의 스토리를 엮어 줄 손주가 있다는 것에서 할머니는 저승에서 엄청 만족을 하시지 않을까 생각듭니다.
우리의 선인들은 누구나 많은 스토리를 가지고 있었다고 봅니다.
그걸 말이나 글로 표현을 한다면 텔레비젼서 나오는 드라마보다 더 리얼하고 인간적인 매력을 느낄 수 있으리라 봅니다.
장문의 글을 단숨에 다 읽었습니다.
그리고 그 장면 하나 하나를 연상했습니다.
꾸밈없이 엮어진 어구 하나 하나에 정성과 감동이 깃들어 있는 모습이 역역히 보입니다.
이 세상에 할머니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누구의 할머니 할 것 없이 사연없이 그 시대를 산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봅니다.
격변기에 살았던 우리 할머니들의 자화상을 생생히 보는 듯한 글입니다.
가슴이 많이 움직여 지는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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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연2님의 댓글의 댓글

김석연2 작성일

감사합니다. 허접하게 쓴 글. 좋게 봐 주셔서 고맙습니다.
글을 다듬어야 할 부분도 있는것 같은데 아직은 보이질 않습니다.
우리들의 윗분들은 어떻게 살아왔을까 늘 의문이었으나 어느곳에도  그 기록은 없었습니다.
직접 발로 뛰어 보자고 했지요. 이태가 걸리든 삼년이 걸리든 계속 추적해서 기록으로 남겨 볼려고 합니다.
많이 응원해 주십시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