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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령의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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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규전 작성일 2018-07-03 09:04 댓글 0건 조회 66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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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령의 아가씨


   파블로 피카소가 프랑스 파리에 어느 한적한 카페에서에서 모처럼 휴식도 취하면서 자신의 전공인 스케치를 즐기고 있을 때였다.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묘령의 아가씨가 피카소에게 자신의 모습을 그려달라고 했다. 그러자 피카소는 알았다면서 붓을 들고 그 아가씨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다 그려진 다음 그 아가씨가 피카소에게 실례지만 얼마 정도를 사례하면 될까요?” 라고 물었다. 그러자 피카소는 “ 5000프랑만 주시죠.”라고 말했다고 한다. 참고로 1프랑은 유로화가 통용되기 직전 한국화폐로 180원 정도 되었다고 한다. 그러자 그 아가씨 왈

 

   “아니, 몇 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작업을 했는데 그렇게 많은 돈을 요구하다니요?”, “혹시 잘못 말씀하신게 아닌지요?” 라고 정색을 하면서 피카소에게 말했다. 그러자 피카소는 아니, 짧은 시간이라 해도 내 시간을 아가씨을 위해 썼으면 당연히 그와 상응하는 댓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라고 말하자 그 아가씨는 아무리 당신이 유명하다 해도 당신 말에 대해서는 이해를 할 수 없어요.”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피카소 왈

 

  “아가씨가 말한 짧은 시간은 내게는 엄청나게 귀한 일을 한 것에 대한 총체적인 시간이랍니다. 나는 아가씨의 초상을 스케치하기 위하여 무릇 몇 십 년을 공 들여 창조적 작업의 과정을 거친 사람입니다. 결국 내 인생을 걸고 갈고 다듬은 결정체입니다. 그 정도의 댓가를 받지 않고 제 그림을 의뢰할 수 있다는 것은 아가씨가 저를 잘 못 보았다고 봅니다.” 라고 말했다.

 

  피카소가 그 아가씨에게 돈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는 의미가 크게 없다고 본다. 물론 피카소가 돈을 받기 위해서 그 아가씨에게 스케치를 해 준 것도 아니라 본다. 피카소 자신이 지금까지 창조적인 작업을 통해서 쌓은 업에 대해서는 그 가치를 늘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니, 자신의 가치를 승화시키기 위해서 늘 고심을 하고 있었다는 반증의 사례가 아닐까 생각된다.

 

  우리는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얼마만큼의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스스로 성찰해 보자. 많은 사람들은 다시 태어나면 현재에 하고 있는 이 짓거리는 하지 않을 것이라 다짐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라 생각될 것이다. 현재 하고 있는 일에 가치는커녕 진절머리가 날 정도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혹간 있을 것이다. 그런 일을 왜 때려치지 않고 하냐고 물으면 답은 간단하게 되 돌아 오리라 본다. “목구멍이 포도청이요. 배운 것이 이 짓거리인데 어찌하겠습니까?”로 귀착되는 경우가 많으리라 본다.

 

  물론 자신에 일에 대해서 피카소처럼 창의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상상을 초월하는 가치를 불어 넣으며서 살아가는 사람도 있으리라 본다. 무수히 많은 분야에 프로급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런 부류라 보면 될 것이다. 똑 같이 그림을 그려서 먹고 사는데 어떤 사람들은 피카소 같은 사고방식에 젖어 있는 반면 또 어떤 사람은 호구지책의 수단 정도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똑 같은 일을 하는데 접근하는 방법이 왜 이리 천양지차로 나는가가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가 아닐까 싶다.

 

  필자는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쳐서 먹고 사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칠판과 백묵을 접한 지 벌써 삼십 수 년 째를 넘기고 있다. 강산이 세 번 변하고 자투리 시간도 한참 지나고 있다. 옛날에는 동일한 일을 십년만 하면 도사가 된다고 했다. 그런 논리로 따진다면 나는 이미 세 가지 영역 정도에서 도사가 되어있어야 하는데 그와 반대로 도사의 발바닥도 따라가지 못한 신세로 전락이 되었다. 아니 다른 사람들이 민줄이 대는 나이에 접어 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직업에서 연식이 높아질수록 가치가 더 높아지는 반면 어떤 사람은 반대의 방향으로 가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경력이 쌓이면 쌓일수록 냉대를 받는 직업 중 하나가 교지이 아닐까 생각된다. 우리 사회에서 경륜이 높은 중량급의 의사, 변호사, 판사 같은 경우 전문직으로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많은 사람들로부터 신뢰성을 부여받고 있는 반면, 대부분의 교사는 그와 반대의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젊은 날에 뼈 빠지게 아이들을 위해서 가르쳤으면 나이를 먹고도 그 경륜과 가치를 인정받아야 되는데 그렇지 않은 것이 현실이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나이 많은 선생님이 담임이라도 맡게 되면 많은 학부모들은 이맛살이 저절로 찌푸려지게 된다. 경륜이 풍부한 선생님이 담임이 되면 여러모로 좋을 것 같은데 그와 반대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데서 충격을 감출 수 없는 것이다. 이 사회의 인식이 잘못된 것인가 아니면 나이 먹은 선생이 잘 못 된 것인가에 대해서 머리 터지게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은 어떤 일을 하면서 인생이라는 것을 꾸려가게 돼 있다. 부모가 물려 준 재산으로 반건달의 생활을 한 사람도 그 세계에 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경륜이 생길 수 있는 것이다. 어디 이 뿐이겠는가? 사회에서 인정을 해 주는 몇몇 영역을 제외하고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쌓은 귀중한 업에 대한 가치를 팽개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이다. 남이 알아주지 않으니 더더욱 자신의 케리어가 자랑스럽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 간다고 생각될 것이다. 돈키호테식으로 자신을 합리화 한다면 모를까, 보통의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남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김이 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본다.

 

  곰곰이 생각해 보자.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큰 가치를 발휘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가치가 타인에게 얼마나 인정을 받고 있는지? 아무런 인정도 받지 못한다면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피카소는 어느 나라 사람일까요? 저는 이 글을 쓰기 전까지 당연히 프랑스 태생으로 짐작하고 있었는데 그렇지 않습디다. 그 사람의 출생지가 어딘지 아는 순간 왜 피카소가 유명할 수 밖에 없었는지 재삼 인식되리라 봅니다. 출생지가 어디면 어떻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영혼까지 일깨워 준다면 그 보다 더 귀한 일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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