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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은 푸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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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규전 작성일 2018-05-05 07:28 댓글 0건 조회 83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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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월은 푸르구나.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그러고 보니 오늘이 어린이 날이다.

어제, 영양가도 별로 없는 잡다한 일을 많이 했던 관계로 일찍 잠이 들었다. 나이를 먹으면 잠이 없다는 이야기가 실감나는 새벽이었다. 어슴푸레하게 날은 밝아오는 것 같은데 시계를 보니 새벽 5시 근처를 가리키고 있다. 일어나자니 주변 가족들이 불편해 할 것 같고, 그대로 누어있자니 오만 도깨비 같은 생각이 머리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여느 때는 시간이 잘 가더니만 이런 때는 거북이 기어가는 것처럼 시간도 잘 안감을 느낀다.

 

   이번 주는 내리 3일이 공휴일로 되어있다. 달력에 붉은 글씨로 표기가 되어 있으니 그런 가부다 할 정도로 감각이 무디어 지고 있다. 3일의 공휴일이 주어졌는지 또렷하게 알 필요성이 점점 줄어든다는 것이다. 사람의 인지의 강도가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점점 미약하게 된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끼게 된다. 오늘은 오월의 초입, 지난 51일 노동절을 시발점으로 많은 기념일과 행사가 펼쳐지게 된다. 트리플케어를 책임지고 있는 나이 대에 속한 사람들의 오월은 설렘과 기대가 아니라 걱정과 한탄이 짓누르는 세대가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5월을 뛰어 넘어 막바로 6월로 갈 수 없는 처지고 보면 싫던 좋던 5월을 잘 맞이 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뭣이 되던 되겠지 하는 일념으로 맞이한 5월도 벌써 5일을 까먹었다. 뭔가 하기는 한 것 같은데 남은 것은 쥐뿔도 없는 하루하루가 아니었나 본다. 오늘은 어린이날, 소파 방정환 선생님이 자라나는 새싹들을 위하여 고안했다는 날이 오늘인 것이다. 과거에 한 가정에서 많은 아이들을 낳고 그 아이들을 제대로 보살펴주지 못했던 시절에 아이들의 유년시절은 별로 아름답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특별하게 잘난 집안이 아닌 이상 아이들이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처지가 안 되었다는 것이다.

 

  필자의 유년 시절도 당시를 살았던 사람과 별 반 차이가 없었다. 어린이 날이라 해서 부모님이 나에게 선물을 사 준 기억도 없고 외식을 시켜준 기억은 더더욱 없었다. 아니 촌구석에서 살았는지라 외식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삼시세끼 얻어먹는 것도 큰 행복이자 행운이었던 시절이다. 외식이나 선물 따위는 사치스러운 행복이었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어린이날이 기억되는 것은 학교가 아니었나 싶다. 당시 어린이날이 공휴일인지 아니면 학교에 갔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그 곳에 가면 어린이날 노래라도 배웠다는 것이다. 맨 위에 어린이날 노래의 가사를 적은 것도 오십 수년 전에 배웠던 기억을 되살린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많은 기념일과 봉착하게 된다. 이런 것의 의미를 희미하게나마 알 수 있게 해 준 곳이 학교가 아닐까 생각된다. 어린이날도 마찬가지로 그 날에 합당한 노래도 가르쳐주고 선생님이 좋은 말씀도 해 주셨기에 현재의 우리가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학교에서 어린이날 노래를 배우지 않았다면 아름다운 그 노래의 가사를 어찌 기억하고 있겠는가? “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얼마나 아름다운 표현인가? 그리고 그런 표현을 도출해 낸 사람의 감성을 그 또한 얼마나 창의적인가? 우리는 낫살이나 먹었지만 그런 생각을 표현으로 나타내 본 적이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아니 생각할 생각도 안하고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위 가사를 뇌까리면서 갑자기 눈물이 핑 돔을 느꼈다.

 

   검정 고무신에 허름한 옷가지를 걸치고 청밀(호밀)을 맷돌에 타개서 만든 밥을 먹었던 시절에 부른 어린이날 노래가 엊그제 같게 만 느껴진다. 천진난만했던 그 시절이 오늘 새벽에 왜 이리 크게 다가오는지 이해를 하기 힘들다. 작년에도 제작 년에도 어린이날 이 있었지만 올해처럼 울컥하게 다가온 어린이날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마치 내가 어린이날을 맞이하는 느낌이 들어갈 정도이다. 그렇다고 나에게 어린이날 선물을 해 줄 놈도 없고 그런 이야기를 해 봐야 미친놈 소리밖에 못들을 것 같으나 내 마음속에는 어린이날이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듯 한 느낌이 들어간다.

 

   필자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요즘 어린이들보다 훨씬 더 허접하게 어린이날을 보냈다고 본다. 적어도 물질적인 측면에서는 그렇다고 본다. 하지만 정신적인 면에서는 현재의 어린이들보다 좀 더 격이 높은 대접을 받지 않았나 싶다. 현재의 어린이날이 요란을 떤다고 표현하면 과거 오륙십년 전 어린이날은 그야말로 어린이를 존중해야 한다는 의식을 싹 틔웠던 시절이었다고 본다. 지금은 어떤가? 집에 한 둘 밖에 없는 어린이를 위하여 부모는 물론 조부모까지 나서서 요란을 떨어야 할 것이다. 아니 원님 덕에 나팔 분다고 어린이 덕분에 대공원도 가 보고 맛있는 요리집에 가 볼 기회도 생기는 것이다. 선물가게에 가서 바리바리 장난감도 사 줄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물질이 정신을 압도하는 어린이날의 풍경이 벌어지는 것이다. 어른들은 물질공세로 어린이날에 주어진 자신의 책무를 다 했다고 위안을 삼을 것이다.

 

   2018년 어린이날은 필자에게는 그냥 법정 공휴일로 다가 온다. 새벽잠이 없다보니 울컥 어린이날이 생각났을 뿐이다. , 그러고 보니 한참 전에 어린이었던 우리 아들이 오늘 새벽에 집에 왔다. 군대까지 마친 아들인데 어린이날처럼 해 주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해 준다 하여도 멋쩍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주변에는 어린이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어린이가 없는 어린이날이 몇 년째 반복되고 있다. 우리가 비록 어린이는 아니지만 몇 십 년 전을 회상하면서 우리 스스로가 어린이의 시절로 잠시 타임머신을 되돌려 보는 것도 의미 있지 않을까 싶다. , 아름다운 어린이날이여 다시 내게로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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