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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초희(楚姬) - ‘筠’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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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은 유배지에서 학당을 열어 학동들을 가르치는 한편,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를 집필하면서 유재론(遺才論)과 호민론(豪民論)을 제시하며 그동안 몸소 겪어 온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정치사상을 드러낸다.
균은 이 문집에서 "인재를 등용할 때는 출신과 신분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야 한다"며, "천하에 두려워할 바는 오직 백성일 뿐이다"라며 엄격한 신분제 유교 국가인 조선 사회에서 파격적인 화두를 던진다.
균은 호민론에서 백성들을 '항민(굴종하는 백성)', '원민(원망만 하는 백성)', '호민(항거하는 백성)'의 세 가지 부류로 나누고, 이 중에서 가장 두려워해야 할 존재로 호민을 꼽았다. “때를 기다렸다가 호민들이 들고 일어나기 시작하면 침묵하던 항민과 원민들과 합세해 같이 일어나게 되니 호민이 일어나지 않도록 올바른 정치를 해야 한다”는 것이 허균의 '민본사상'이었다.
허균의 이러한 급진적인 사상은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한 소설 <홍길동전>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홍길동전>은 조선 사회에서 신분의 차별과 억압을 받던 서얼 출신 주인공이 기득권 세력에 저항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균에게 홍길동은 현실의 부조리를 대신 타파해 줄 가상의 영웅이자 페르소나였을 것이다.
또 한 균은 "그대들은 모름지기 그대들의 법을 지키게, 나는 내 나름대로 내 삶을 이루겠노라"는 심경을 토로하며 자신만의 길을 가겠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은 허균의 이상, 신념과는 정반대로 움직였으니, 바로 1613년의 계축옥사(癸丑獄事)였다. 당시 모사(謀士) 이이첨을 중심으로 한 대북파는 반대파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옥사를 일으켰고, 균은 김제남과 함께 역모를 꾸몄다는 의혹을 받아 처형될 위기에 처한다. 후일 학계에서는 이 역모 사건이 대북파의 공작이었을 가능성이 크며, 균이 서얼들과 가깝게 지낸 것을 이유로 누명을 쓴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그것이 다만 의혹일지라도 균에게는 목숨과 관계되는 일이었다. 이 과정에서 균에게는 굴욕적이라 할 수 있는 일이 발생된다. 허균이 그동안의 소신을 굽히고 대북파의 실세인 이이첨과 화해를 하고 아예 대북파의 일원이 되기까지 한 것이다. 이이첨이 실세였던 광해군과 뜻을 같이 하며 심지어 광해군과 정적관계이던 인목대비의 폐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순탄하지 않은 관직 생활에 자신의 이상과 현실 정치의 괴리에서 갈등하다가 일단 목숨을 부지하고 보자는 속셈에서 자신을 속이고 이 같은 노선을 걸은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조선의 관료 사회에서 허균만큼 파직과 복직을 거듭한 인사는 드물다. 아니 없었다. 학계에서는 이를 두고 균의 행적이 괴짜이기도 했지만 능력이나 처세술이 보통이 아니었다는 해석도 나온다.
균은 광해군 정권에서 한때 정2품 좌참찬의 자리까지 올랐고, 자신의 딸을 세자의 후궁으로 들여서 왕실과 사돈까지 맺게 되면서 입지가 더욱 탄탄해지는 듯했다. 하지만 1618년 8월 17일, 전격적으로 의금부에 하옥된다. 허균이 서얼과 승려들을 모아 역모를 꾀했다는 혐의였다. 이에 균은 혐의를 단호하게 부인하며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간신 이이첨은 대북파 신하들을 선동해 허균의 처형을 강하게 주장했고, 역모사건이었던 만큼 광해군은 대북파 조정 대신들의 거듭된 요청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은 당시 세자빈이 바로 이이첨의 외손녀였고, 허균의 딸이 세자의 후궁으로 들어오면서 이이첨의 입지가 크게 흔들렸기 때문이라는 설이 설득력을 얻는다. 더구나 허균의 사형을 서둘러 집행한 자는 바로 시대의 간신 이이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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