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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초희(楚姬) - ‘筠’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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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난 풍운아이자 낭만 가객이었던 그는 어쩌면 평소 관심을 두고 있던 당대의 여류시인이자 기생인 매창(梅窓)이 있는 부안으로 자원해 갔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부임하면서 드디어 매창을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의 관계가 일설에는 시문을 통해 교제를 하는 이른바 ’정신적 사랑’이었다고도 하고 매창이 그의 첩실이었다는 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리 기생이라한들 당시의 기생은 지조가 있어 함부로 처신을 하지 않았기에 균의 매창에 대한 일방적 흠모일 가능성도 배제할수 없다.
부안에서 처음 발을 들여놨을 때 그 고을의 수령이 우연하게도 매창으로 하여금 균의 수청을 들게 하였는데 둘은 금시 의기투합하여 종일 술잔을 나누며 시를 주고받았다고 전해진다. 단편적으로 매창의 ‘취객에게(贈醉客)’ 라는 시를 읽어보면 그녀의 시적 감각과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을 느낄 수 있다.
醉客執羅衫 취한 손님이 명주 적삼 옷자락을 잡으니
羅衫隨手裂 명주적삼이 그 손길에 그만 찢어져 버렸네.
不惜一羅衫 명주적삼 하나쯤이야 애석할 게 없는데
但恐恩情絶 다만 은정이 끊어질까 그것이 걱정되네.
두 사람은 고상하게도 시문으로 맺어졌기에 매창은 그 만남을 소중하게 여겨 균과 잠자리는 하지 않고, 그녀의 조카를 허균의 잠자리에 들여보냈다 한다. 더러는 매창에게는 이미 사랑하는 남자 유희경(劉希慶/매창보다 스물여덟 살이나 연상인 천민출신 문신이자 시인으로 매창과 연인 사이)이 있기에 그랬을 것이라는 설도 있지만 이후 균과 매창 두 사람은 어떤 형태로든 계속 관계를 이어간 것으로 보인다.
후일(1609년/광해군 1년)에 매창에게 쓴 편지에서 “그대는 성성옹(惺惺翁/성성옹은 도적을 없애고 천군을 다시 왕위에 올리는 인물로 균 자신을 일컬음)이 속세를 떠나겠다는 약속을 어겼다고 분명히 웃을 걸세”라고 했다. 균이 매창에 빠져 벼슬을 그만두고 매창과 함께 은거(隱居)하며 시문이나 나누겠다고 약속을 한 것으로 보이는데, 한편으로는 자신을 일컬어 성성옹이라며 그만큼 위험한 인물이라는 뜻도 암시하고 있다. 허균은 스스로의 성정(性情)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보다 솔직하게 표현하면 풍류객으로서 일종의 사행성도 농후했다고 보아야 한다.
균이 매창을 얼마나 애모했는지 매창이 서른 여섯 살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뜨자 균은 매창의 죽음을 에도하며 다음과 같은 헌시를 쓴다.
妙句堪擒錦 신묘한 글귀는 비단을 펼쳐 놓은 듯하고
淸歌解駐雲 청아한 노래는 머문 구름을 풀어 헤치네
偸桃來下界 복숭아를 딴 죄로 인간세계로 내려왔던가
竊藥去人群 불사약을 훔쳐서 인간세상을 떠났네
燈暗芙蓉帳 부용꽃 새겨진 장막에 등불은 어둡기만 하고
香殘翡翠裙 비취색 치마에는 아직 향내가 남아있는데
明年小桃發 내년 복사꽃 필 때쯤이면
誰過薜濤墳 누가 과연 설도의 무덤을 찾을까
매창이 가고 난 후에도 매창을 두고 연적(戀敵)관계인 유희경을 의식한 듯한 시다.
<허균과 매창의 사랑 이야기는 '매창편'에서 보다 상세하게 다루기로 한다.>
매창과 만났을 시기 균의 나이 33세, 일에서도 사랑에서도 한창 피 끓는 나이다. 그의 성정은 매창뿐만 아니라 한성의 기녀들을 지방으로 불러내려 풍류를 즐기고 이 같은 일들이 상소문이 되어 조정에 오르자 또 다시 파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복직되어 1602년 성균관사예(司藝),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역임하고, 같은 해 명나라에서 파견되는 사신을 맞는 원접사 이정구(李廷龜)의 종사관이 되어 명나라 외교관들을 상대하는 등 내무와 외교에 종횡무진하는 활동상을 보인다.
도대체 알 수 없는 일이다. 그의 능력과 처세술이 어땠길래 툭하면 벼슬 떨어지고 붙기를 이처럼 밥 먹듯 하고 숱한 구설과 상소에 휘말리면서도 승진 가도를 달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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