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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초희(楚姬) - ‘筠’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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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들 평탄한 인생이 있을까. 강릉의 외가 애일당에 내려오기에 앞서 균에게는 행과 불행을 오가는 숱한 곡절들이 있었다.
균의 나이 열두살 때인 1580년(선조 13년)에 부친 허엽이 상주에 있는 객관에서 세상을 떠났다. 열다섯 살 때는 그의 스승이자 보호막이었던 친형 허봉이 동향인인 율곡 이이를 탄핵하다가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됐다. 그리고 다시는 한성에 발을 내딛지 못하고 금강산에서 객사했다. 생전의 허봉은 균에게 “인간에게는 온갖 일들이 있는 것이어서 높은 재주가 있은들 영락(零落)하여 초망(草莽)을 떠도는구나”라는 내용의 편지와 함께 <하곡집(荷谷集)>을 보내기도 했다.
이후 스무 살이 넘게 나이 차가 나는 이복 형 허성의 집과 강릉의 외가를 오가며 어렵지 않은 청소년기를 보낸다. 초시에 응시하여 합격할 때 그의 나이 17세였다. 신분이 얼자임에도 불구하고 허엽과 형 허성의 후광 때문인지 균은 이로 인한 차별을 받은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초시에 급제하면서 안동이 본향인 김대섭(金大涉)의 차녀와 혼인하는 경사도 있었다. 균의 부인 안동 김씨 친정어머니는 청송 심씨 심전(沈銓)의 딸로, 좌의정 심통원과 영의정 심연원의 종손녀이자 인순왕후, 심의겸의 6촌 여동생이다. 정략결혼인지 또는 상류층 간에 교류하는 과정에서의 중매결혼인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이른바 명문가의 사위가 되었다. 든든한 뒷배까지 생긴 그는 23세 때인 1592년(선조 25년)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싸운 공로로 훗날 선무원종공신 1등(宣武原從功臣一等)에 녹훈되었다. 그러나 그가 어느 전투에 출정한 공로로 녹훈되었는지는 구체적 공적은 밝혀진 것이 없다.
하지만 얄궂은 운명은 그를 그냥 두지 않았다. 균이 20세 때인 1589년 생원시에 급제하였으나 와중에 임진왜란을 피해 피난을 하던 부인 김씨가 단천에서 첫아들을 낳다가 사망하고 어린 아들도 전란 중에 병사한다. 가족을 잃은 허균은 이때 인생무상을 느끼고 어머니를 모시고 강릉의 외가인 애일당을 보수하여 거주하며 집필과 공부에 몰두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쓴 기록이 <애일당기>와 <학산초담>이다. 그는 애일당기를 쓰면서 애일당 뒷산의 이름을 따서 교산(蛟山), 자주 찾아가서 마음을 추스르던 학산을 따서 ‘학산(鶴山)’이라는 또 하나의 호를 붙였다.
한편 김성립(金誠立)에게 출가한 누이 난설헌은 시댁과 불화를 겪은데 이어 자식들이 잇달아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눈물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1589년 3월 19일 현생에서의 숱한 괴로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녀의 나이 고작 27세였다. 이때 균의 충격과 슬픔은 차마 말로 형언키 어려웠고 이를 잊기위해 기방출입이 잦았다.
와중에 25세인 1594년(선조 27년)에 정시문과(庭試文科)의 을과에 급제한 균은 승문원 사관(史官)으로 임명되고, 그해 4월 명(明)나라의 사신을 접견하는 접반사(接伴使)의 자격으로 심희수와 명나라 사신을 수행하고 되돌아왔다. 이후 선조의 신임을 얻어 설서(說書)를 지낸데 이어 정6품 예조좌랑으로 승진하고 명나라에 다녀와 병조 실세인 병조좌랑(兵曹佐郞)에 오른다.
1595년 그의 나이 27세에 아내의 시신을 수습하기위해 관직을 버리고 함경도 단천에 가서 유골을 수습하여 강릉으로 이전했다고 전해진다. 탈 관직을 한 이 시기를 이용하여 강릉으로 간 그는 강릉부자 정구와 함께 의기 투합하여 <강릉지/江陵誌>를 엮었고, 이 책을 선조에게 바치자 선조는 어의(御醫) 허준을 불러 함께 의학서를 만들라는 어명을 내렸으니 <동의보감/東醫寶鑑>이 만들어진 계기가 된다.
다음해인 1597년(선조 30년) 허균은 동인의 초대 당수인 김효원의 딸과 재혼한다. 김효원의 동생이자 후처의 숙부인 김이원은 북인의 중진이었다. 이때 그는 광해군을 수행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공로로 후에 위성원종공신 2등에 책록된다.
1597년 3월에는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급제를 하여 종3품으로 승진하였으나 웬일인지 그에게는 인사상 불이익이 가해져 관례처럼 주어지던 정3품이 아니라 종3품 직책이 부여되었다. 이에 따라 공주목사에 부임했으나 평소 그를 마땅하게 생각하지 않던 견제자들의 정치적 책략에 휘말려 탄핵받아 파면되고 유배를 당했다. 유배를 마친 후 복직이 되었으나 인맥 중심의 중앙정치에 환멸을 느낀 균은 자원하여 1598년 황해도 도사(都事)로 부임하였는데 이때 한성부에 있던 그의 애첩인 기녀가 황해도 임지로 와서 그의 수발을 들었다.
그러다가 관가에 기생을 끌어들여 수발을 들게 했다는 사유로 한성부로부터 또다시 탄핵을 받고 여섯 달 만에 파직된다. 그 뒤, 복직하여 춘추관기주관(記注官)과 세자시강원의 낭관과 지제교(知製敎)를 거쳐 그해 말 장생전(長生殿) 낭청이 되어 의인왕후의 국장도감(國葬都監)과 빈전 행사에 참여한 공로로 1601년 5월, 종3품에서 정3품으로 특별히 품계를 올려받게 된다.
호사다마라 했다. 특별 품계가 여성 편력이 많았던 균에게 또다시 스캔들에 휘말릴 단초를 제공한다. 균이 특별 승진으로 1601년(선조 34년) 충청·전라 지방의 조세 관리인 전운판관(轉運判官)으로 부임하면서 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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