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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 늙음 누가 노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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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영기(43회)
작성일 2013-05-30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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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85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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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의 시점은 역사적으로 가변적이었다. 즉 누가 노인이며 노년의 시작은 언제인가? 하는 문제는 특정한 산술적 연령보다 각 개인의 용모와 신체 상태에 대한 주관적이고 인상적인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늙음을 이유로 60세를 병력과 노역(예비군, 민방위, 국민연금의무,공공의무근로 ) 등 공 공 의무의 수행을 면제하는 연령의 시점으로 삼는 공적 차원의 관례는 이미 고대나 중세에도 시행된 놀랄 만큼 오래된 것이었다.
노인에 대한 인식의 표상의 경우는 너무나 다양하다 고대 이래 문학 ,철학, 미술작품 등에 등장하는 늙음과 노인의 이미지가 얼마나 다양한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고대 로마시대 철학자 키케로는 노인을 지혜와 절제라는 미덕과 노년의 즐거움을 강조한 반면 동시대 시인 유벨날리스는 조롱과 독설로써 노년의 재앙을 길게 나열하였다.
유럽의 화가들은 노인의 주름진 얼굴과 마디진 손을 통해 숙련된 기술과 노동의 품위를 표현 하면서도 동시에 치아와 시력 상실 반신불수 등 노년의 병 약한 모습을 묘사했다.
이처럼 노인과 늙음, 노년에 관해서는 상호 대립하고 모순된 표상이 긍정과 부정의 정형화된 형태로 교차하고 병존했다.
다시 말해 노인은 존경과 동시에 조롱과 경멸의 대상이 얻고 늙음은 지혜와 어리석음을 상징 했으며 노년은 욕망의 초월과 집착을 의미하기도 했다. 늙음은 죽음과 마찬가지로 누구나 피할 수 없다.
젊음이란 본래 피어날 때부터 시들게 되어 있는 한 송이 꽃에 불과 하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유일한 소설 <말테의 수기>를 기독교적 관점에서 재해석해보면 죽음과 생명은 일직선 상 에 놓여 있다는 이야기다.
“여자들이 아이를 잉태하고 서 있는 모습이 얼마나 우수에 찬 아름다움을 느끼게 했는지 그녀들은 자기도 모르게 가느다란 손을 자기 배위에 올려놓고 있는데 하나는 태어 날 아이 었고 다른 하나는 죽음이 였다.
이 한 줄만 봐도 기가 막힌다. 애를 갖는 것은 가장 기쁜 생명인데 죽는 인간을 하나 만드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우수한 아름다움이 없이는 생명을 느낄 수 없음에도 그런 죽음과 생명을 하나로 느끼는 것이 여자들의 배다. 두 개의 씨앗을 잉태한 여자 임산부들의 우수에 찬 미소와 슬픈 표정은 아이를 잉태한 어머니는 죽음이 함께 있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말테의 수기>는 생명을 다루는 첫 번째의 서장이 바로 임산부로 처음부터 시작되어서 걸어가면서 그 옆에는 병원이라는 죽음이 있다.
릴케는 파리라는 도시가 임산부의 배처럼 그 안에 생명과 죽음이 싹트고 있다고 표현하고 생(生)과 사(死)가 대립이 아닌 동일(同 一)개념 이라고 하는 것을 병원이라는 이미지로 그려 냈다. 임산부의 한쪽이 생명을 잉태하고 죽음을 잉태하는 곳이 병원이다.
오늘날 교회의 상징적 표현은 병원(치유와 죽음), 학교(교육기능), 군사 훈련장(제자훈련) 으로 표현 한다.그중 가장 매력적 표현은 죽음을 몰아내고 ,사망을 이긴 부활교리이다. 교회는 죽음의 냄새가 풍기는 이 세상에서 생명의 전율을 느끼게 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
지식적인 면에서
안다는 것은 늙음의 표상이다. 세월의 흐름속에 많은 경험으로 쌓아온 경륜을 말한다.
알고 있는 것이 많을수록 고정 관념이 많아지게 된다. 그래서 그의 정신은 이미 알고 이 쓴 자리에 머물게 되면 자신이 모르는 미래에 대하여서는 관심이 멀어지게 된다.
캄보디아 여행 중 들려오던 아리랑에 귀가 번쩍 뜨였다. 익히 내 귀에 익은 아라랑 이 들려와서 자연스럽게 박수를 첬다. 한국 관광객을 환영하기위한 연주라고 가이드가 말했다.
젊은이 특징은 미래지향적이다. 미래의 성장을 보고 자신을 앞으로 전진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직 모른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있다는 뜻이다.
자신이 많이 알고 있어도 아직 모르는 게 많다고 느끼게 된다면 정말 젊은 것이다. 배움을 계속 진행하는 사람은 신체적 능력에 관계없이 더욱 가치 있는젊음을 소유한 사람이라고 할수 있다.
세월이 가면 나무의 밑 둥이 커지고 단단해 지듯 정신도 단단해 진다. 그래서 쉽사리 타인의 견해에 넘어 가지 않는다. 타인의 의견에 쉽게 공감하지도 못한다.
자신만의 독립적 세계를 추구해 하나의 개성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늙음이란 개성이 얼마나 단단해 졌느냐의 정도에 달려져 있는 것이다. 나이를 많이 먹어도 개성이 단단하지 않다면 아직 젊었다고 말 할 수 있다. 개성은커녕 아직 기미 좋차 없다면 아직 어린 사람인 것이다.
사물을 바라 볼 때 아무런 생각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 드린다면 그는 갓난아이가 될 것이다. 소설가 박범신의 작품 은교에서 얻은 경구로 내 이야기를 끝내려고 한다.
“너의 젊음이 너의 노력에 의해 얻은 상(賞)이 아니듯이 ”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罰)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늙음을 이유로 60세를 병력과 노역(예비군, 민방위, 국민연금의무,공공의무근로 ) 등 공 공 의무의 수행을 면제하는 연령의 시점으로 삼는 공적 차원의 관례는 이미 고대나 중세에도 시행된 놀랄 만큼 오래된 것이었다.
노인에 대한 인식의 표상의 경우는 너무나 다양하다 고대 이래 문학 ,철학, 미술작품 등에 등장하는 늙음과 노인의 이미지가 얼마나 다양한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고대 로마시대 철학자 키케로는 노인을 지혜와 절제라는 미덕과 노년의 즐거움을 강조한 반면 동시대 시인 유벨날리스는 조롱과 독설로써 노년의 재앙을 길게 나열하였다.
유럽의 화가들은 노인의 주름진 얼굴과 마디진 손을 통해 숙련된 기술과 노동의 품위를 표현 하면서도 동시에 치아와 시력 상실 반신불수 등 노년의 병 약한 모습을 묘사했다.
이처럼 노인과 늙음, 노년에 관해서는 상호 대립하고 모순된 표상이 긍정과 부정의 정형화된 형태로 교차하고 병존했다.
다시 말해 노인은 존경과 동시에 조롱과 경멸의 대상이 얻고 늙음은 지혜와 어리석음을 상징 했으며 노년은 욕망의 초월과 집착을 의미하기도 했다. 늙음은 죽음과 마찬가지로 누구나 피할 수 없다.
젊음이란 본래 피어날 때부터 시들게 되어 있는 한 송이 꽃에 불과 하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유일한 소설 <말테의 수기>를 기독교적 관점에서 재해석해보면 죽음과 생명은 일직선 상 에 놓여 있다는 이야기다.
“여자들이 아이를 잉태하고 서 있는 모습이 얼마나 우수에 찬 아름다움을 느끼게 했는지 그녀들은 자기도 모르게 가느다란 손을 자기 배위에 올려놓고 있는데 하나는 태어 날 아이 었고 다른 하나는 죽음이 였다.
이 한 줄만 봐도 기가 막힌다. 애를 갖는 것은 가장 기쁜 생명인데 죽는 인간을 하나 만드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우수한 아름다움이 없이는 생명을 느낄 수 없음에도 그런 죽음과 생명을 하나로 느끼는 것이 여자들의 배다. 두 개의 씨앗을 잉태한 여자 임산부들의 우수에 찬 미소와 슬픈 표정은 아이를 잉태한 어머니는 죽음이 함께 있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말테의 수기>는 생명을 다루는 첫 번째의 서장이 바로 임산부로 처음부터 시작되어서 걸어가면서 그 옆에는 병원이라는 죽음이 있다.
릴케는 파리라는 도시가 임산부의 배처럼 그 안에 생명과 죽음이 싹트고 있다고 표현하고 생(生)과 사(死)가 대립이 아닌 동일(同 一)개념 이라고 하는 것을 병원이라는 이미지로 그려 냈다. 임산부의 한쪽이 생명을 잉태하고 죽음을 잉태하는 곳이 병원이다.
오늘날 교회의 상징적 표현은 병원(치유와 죽음), 학교(교육기능), 군사 훈련장(제자훈련) 으로 표현 한다.그중 가장 매력적 표현은 죽음을 몰아내고 ,사망을 이긴 부활교리이다. 교회는 죽음의 냄새가 풍기는 이 세상에서 생명의 전율을 느끼게 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
지식적인 면에서
안다는 것은 늙음의 표상이다. 세월의 흐름속에 많은 경험으로 쌓아온 경륜을 말한다.
알고 있는 것이 많을수록 고정 관념이 많아지게 된다. 그래서 그의 정신은 이미 알고 이 쓴 자리에 머물게 되면 자신이 모르는 미래에 대하여서는 관심이 멀어지게 된다.
캄보디아 여행 중 들려오던 아리랑에 귀가 번쩍 뜨였다. 익히 내 귀에 익은 아라랑 이 들려와서 자연스럽게 박수를 첬다. 한국 관광객을 환영하기위한 연주라고 가이드가 말했다.
젊은이 특징은 미래지향적이다. 미래의 성장을 보고 자신을 앞으로 전진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직 모른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있다는 뜻이다.
자신이 많이 알고 있어도 아직 모르는 게 많다고 느끼게 된다면 정말 젊은 것이다. 배움을 계속 진행하는 사람은 신체적 능력에 관계없이 더욱 가치 있는젊음을 소유한 사람이라고 할수 있다.
세월이 가면 나무의 밑 둥이 커지고 단단해 지듯 정신도 단단해 진다. 그래서 쉽사리 타인의 견해에 넘어 가지 않는다. 타인의 의견에 쉽게 공감하지도 못한다.
자신만의 독립적 세계를 추구해 하나의 개성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늙음이란 개성이 얼마나 단단해 졌느냐의 정도에 달려져 있는 것이다. 나이를 많이 먹어도 개성이 단단하지 않다면 아직 젊었다고 말 할 수 있다. 개성은커녕 아직 기미 좋차 없다면 아직 어린 사람인 것이다.
사물을 바라 볼 때 아무런 생각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 드린다면 그는 갓난아이가 될 것이다. 소설가 박범신의 작품 은교에서 얻은 경구로 내 이야기를 끝내려고 한다.
“너의 젊음이 너의 노력에 의해 얻은 상(賞)이 아니듯이 ”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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